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2025년 하반기 현대미술 기획전으로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Mark Bradford: Keep Walking》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이자 아시아에서 개최된 전시 중 최대 규모의 회고전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전개된 그의 작업 세계를 회화, 설치, 영상 작업 등 약 마흔여 점의 작품을 통해 조망한다.

도시는 단순히 건축물이나 장소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반영되는 생활의 장이자 자본과 권력,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역동적 공간이다. 따라서 도시는 단순한 이동 경로나 물리적 배경을 넘어, 권력과 규범, 시선,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사회적 공간이자 정치적 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들레르가 제시한 플라뇌르의 '도시를 걷는 시선'은 근대성의 특권적 경험을 상징한다. 도시를 유유히 배회하며 관찰하는 플라뇌르의 걷기는 자유롭고 익명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자유는 처음부터 특정한 몸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오늘날 그 걷기는 계급·인종·성별에 따라 비대칭적인 조건 속에서 재구성되며,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위협과 배제의 경험으로 남아 있다.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바로 이 비가시적 층위를, 거리에서 수집한 도시의 잔해를 화면에 새기며 드러낸다.
로스앤젤레스 남부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같은 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브래드포드는,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와 포스터, 빌보드 광고지, 미용실 엔드페이퍼 등 도시의 잔해를 캔버스 위에 겹겹이 붙이고 긁어내며, 찢고 다시 덧입히는 방식의 대형 추상 작업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업은 도시의 일상적 부산물을 재료로 삼아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 흑인 공동체의 삶과 소외된 이들의 경험,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룬다.
이 글은 걷기라는 일상적 행위의 실천적 양상과, 그 행위가 펼쳐지는 도시 공간을 함께 사유함으로써, 이 둘이 브래드포드의 작업 속에서 어떻게 맞물려 우회적 균열을 만들고 저항의 가능성을 드러내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떠오르다〉이다. 약 600제곱미터 크기의 전시장 바닥을 빼곡히 채운 이 작품 위를 관람객은 천천히 거닐며 감상하게 된다. 이는 기존의 정적인 감상 방식에서 걷는 행위를 통한 감상으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동시에, 관람객으로 하여금 브래드포드의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노끈으로 이어진 전단지와 포스터를 마주하게 한다. 그 위를 직접 이동하며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험은, 걷기라는 행위에 담긴 의미를 새삼 사유하게 만든다.

다음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기면, 벽을 따라 엔드페이퍼로 구성된 대형 작품들이 시야를 채운다. 엔드페이퍼는 파마 시 머리카락을 감싸는 반투명한 종이로, 작가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용실에서 자연스럽게 접해 온 재료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미용실은 단순히 헤어스타일을 가꾸는 장소를 넘어, 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공동체의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문화적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브래드포드가 엔드페이퍼를 그을리고 화면 위에 겹겹이 붙이는 과정은, 흑인 미용실이라는 문화적 공간에 축적된 기억과 관계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로 읽힌다. 나아가 〈파랑〉과 같이 엔드페이퍼를 캔버스에 줄지어 나열한 뒤 파란색 스텐실로 지도 형태를 구현한 작업에서는, 격자적으로 구획된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도시 공간의 구조가 인종적 함의를 지닌 엔드페이퍼와 결합하며 독특한 긴장을 형성한다. 도시를 추상화한 이 화면 위에서 엔드페이퍼는 더 이상 단순한 미용실의 도구가 아니라, 특정 인종과 계급이 밀집된 구역, 분리와 분할의 역사를 환기하는 기호로 기능한다. 관람자는 이러한 종이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결을 따라 벽을 천천히 걸으며, 흑인 공동체의 장소성과 그 위에 얽힌 인종적 억압의 문제를 감각하게 된다.

그다음 전시장에서는 브래드포드가 살아가는 지역 사회의 현실을 드러내는 포스터와 전단지를 활용한 작업들이 펼쳐진다. 신용불량자를 대상으로 한 대출 광고, 소송 유치 문구, 저가 보험 상품 광고 등 도시 공간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들이다. 작가는 이 전단지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불리고 다시 말리는 등의 행위를 통해 점차 추상회화로 전환시킨다.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전단지가 추상 회화로 변모하는 과정, 그 안에 쌓이는 물성과 시간성은 곧 도시의 잔해들로 축적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명백한 운명〉에는 "조니가 집을 삽니다(Johnny Buys Houses)"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전단지에서 가져온 이 문구는 취약 계층으로부터 주택을 사들이는 투기 자본의 현실을 반영한다. 토착민의 땅을 정복하고 탈취하는 것으로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도시 공간 안에서 수직적인 위계를 형성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다.


흑인의 역사, 강제적 이동과 이주의 문제를 떠올리며 다음 전시장으로 넘어가자, 거대한 구체들이 공간의 중앙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여덟 개 구체가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고, 시꺼먼 바다와 잿빛 대륙은 불균형과 고립, 생태 위기로 점철된 오늘날의 세계를 반영한다. 그 주변으로는 기차 시간표 연작이 펼쳐진다.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피해 북부와 서부로 이동한 흑인들의 대이주를 기차 시간표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업으로, 이름과 숫자가 빼곡히 채워진 캔버스를 통해 국가의 탄압과 차별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의 형상을 감각할 수 있다. 여기서 걷기, 즉 이동은 역사적 고통과 현실의 초상으로 이해된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마지막으로 시선을 붙잡은 것은, 주황색 바지를 입은 한 소년의 뒷모습이었다. 〈나이아가라〉라는 제목의 영상 작업으로, 브래드포드의 이웃이었던 멜빈이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담고 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적막 속에서도 멜빈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어딘가 당차다.
이 전시는 시종일관 걷기와 이동이라는 주제를 건드린다. 흑인으로서, 그리고 특정 계층과 집단으로서 변두리에 놓였던 이들에게 걷기와 이동, 도시는 폭력과 아픔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전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걸음으로써 버티고 저항해온 발걸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전시의 제목이 《Keep Walking》인 것일까?
우리도 무언가에 저항하고 버티며, 계속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