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작품이다. 혼자 쓰고 간직하는 일기가 아닌 이상, 모든 글은 읽는 사람을 위해 쓰인다. 예상 독자층이 수백만 명이든, 한 명이든 모든 작가는 그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따라서 편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 중 가장 내밀한 장르다.
한 명만을 생각하며 온 마음을 쏟아내는 과정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심장 한 조각을 떼어내 바치는 고백이다. 닿으면 델 것처럼 뜨거운 마음이 담긴 편지는, 영혼이 타올라 재가 될지라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불꽃이자 빛이다.
<시라노>, <키다리 아저씨> 등 문학이 원작인 뮤지컬에선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록산 앞에 나서지 못하지만, 언변을 타고난 시라노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 이름으로 연서를 쓴다. <키다리 아저씨> 제루샤는 자신을 후원하는 제르비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본의 아니게 그의 영혼을 뒤흔든다. 창작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에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1980년대를 사는 대학생이 시대를 초월해 서신을 주고받는다.
뮤지컬 <팬레터> 또한 편지로 마음을 나누며 감정의 극단, 즉 파멸까지 질주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배경 뮤지컬 <팬레터>는 19세 작가 지망생 소년 ‘정세훈’이 ‘히카루’란 여성 필명으로 29세 남성 작가 ‘김해진’에게 팬레터를 보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스테디셀러 창작 뮤지컬 <팬레터>는 김유정·이상·김기림 등이 속했던 경성 순수 문학 모임 ‘구인회’ 실제 일화와 작품을 모티브로 탄생했다.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팬레터>는 아름답고 강렬한 음악, 자극적이고 흡입력 있으면서도 애틋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바닥 원고지 조명·그림자 및 거울 연출 등 서사 밀도와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무대 연출로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관객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뮤지컬 <팬레터>는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2026년 2월 22일에 막을 내린 후, 3월 17일부터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도 앵콜 공연을 이어간다. 작품은 2018년 대만·2022~2025년 중국·2024년 일본에서도 공연되며 아시아를 사로잡았으며, 2024년엔 영국 런던에서 쇼케이스를 선보인 바 있다.
세훈의 필명이 의인화된 히카루는 그의 분신, 하나뿐인 친구, 광기에 가까운 작가적 재능, 위험한 치기와 들끓는 욕망까지 상징한다. 히카루 캐릭터, 즉 세훈 내면의 변화는 극이 진행되며 계속 바뀌는 히카루 의상 연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어로 ‘빛나다(ひかる)’를 뜻하는 히카루는 세훈과 해진에게 빛이자 어둠이 됐다. 해진은 세훈이자 히카루가 보낸 편지만으로 사랑에 빠진다. 외롭게 성장했으며, 병에 걸려 몸과 마음이 약해진 해진은 삶이 시들어가는 순간에도 히카루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꽃피운다.
작가로 완성되고 싶단 꿈과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뒤엉켜 덩치를 불리는 히카루의 존재감은 본체인 세훈보다 더 커진다. 히카루가 내는 강렬한 빛은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며 세훈과 해진을 통제한다. 처음엔 속일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해진을 향한 마음이 동경인지, 집착인지, 사랑 비슷한 것인지 자신도 몰랐기에 세훈은 히카루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반면 해진이 편지의 주인에게 갖는 감정은 뚜렷하게 묘사된다. 그는 히카루를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이’라 칭한다. 편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마음속 ‘생의 반려’를 사랑하게 된 해진은 히카루, 즉 세훈의 말들로 얼마 안 남은 생을 힘겹게 버틴다.
생 마지막 사랑이라 더없이 절실하지만, 한편으론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서툰 해진에게서 ‘사랑’의 극단적인 양면성이 드러난다. 시작과 끝, 순수와 관능, 바라지 않다가도 결국 상대의 모든 걸 원하게 되는 아이러니, 애증, 아름다움과 추함, 위선과 위악, 진실과 거짓, 생과 사. 해진은 세훈과 히카루의 언어로 인해 고통과 환희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뜨겁게 살아있었다.
히카루가 세훈인 걸 어렴풋이 눈치챘으면서도 편지란 독약을 삼켜버린 해진. 글이란 독극물이 동경하는 해진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 세훈과 히카루. 세 사람이 번갈아 왈츠를 추는 모습이 묘사되는 넘버 ‘섬세한 팬레터’에선 꿀처럼 단 거짓에 빠져 미쳐가는 그들의 마음이 보인다. 이처럼 거짓은 달콤했고, 진실은 두려웠다.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달았던 거짓은 쓰디쓴 진실로 변하며, 해진은 병마에 잠식돼 세상을 떠난다. 히카루에게 주려던 꽃을 세훈에게 전한 해진은, 마지막 답장에 ‘너의 말들로 버티었다’는 말을 남기며 평생 죄책감을 가질 세훈을 위로한다.
원래 폐병을 앓던 해진은 결국 병마에 스러질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해진은 세훈과 히카루로 인해 마지막 생과 영혼을 불태워 자신을 재로 만들었다. 이처럼 작품은 아름다우면서도 씁쓸한, ‘섬세한 팬레터’이자 ‘섬뜩한 팬레터’의 양면성을 함께 보여주며 선의에서 시작된 거짓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주제 의식도 제시한다.
종이에 손이 베인 세훈을 치료해 주는 해진은 때론 종이가 칼보다 더 날카롭다고 말한다. 이는 글의 파괴력을 드러내는 말이다. 세훈과 히카루는 작가였고, 해진 또한 작가였기에 이들이 주고받은 연서는 날렵한 칼이 돼 서로의 급소를 찔렀다.
그 급소는 욕망이었다. 글 속에서만큼은 불멸의 존재로 살고 싶단 욕망, 완벽한 예술을 완성하고 말겠단 욕망, 글을 통해서라도 상대의 마음에 닿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의 정체를 꿰뚫어 보면서도, 나만을 위해 쓰인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린 모두 세훈이며, 해진이고, 또한 히카루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