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을 배운다는 건 필연적으로 굳은살을 요구한다. 다른 현악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집이 터지고, 그 사이로 여린 살이 드러난다. 다시 아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손끝과 마디가 거칠어지고, 이윽고 볼록하게 굳어버린다. 섬세한 연주에서 적절히 필요한 감각만을 남기고는 현을 반복해서 퉁길 때 생기는 아린 고통은 무디게 흘려보내는 게 마음에 들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오른손으로 줄을 들었다가 뜯고. 파도를 타듯 왼손으로 농음에 머무르는 게, 몰입이 진했다. 그 열두 줄을 타는 것은 그만큼 즐거움이었다.
같은 시기에 교육 봉사를 다녔다.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초중등 학생을 맡아 보충 학습을 지도하는 역할이었다. 영어 회화도, 사자성어도 가르쳤지만,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더 좋아했다. 특히 대학에 다니고 있는, 주변에서 가장 어린 '어른'인 내게 큰 관심을 보이곤 했다. 나이, 가족 관계, 거주지 등 각종 호구조사는 물론 평소 생활 패턴까지 낱낱이 말한 이후에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갈 때마다 궁금한 게 많은지 수업 중간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바쁘게 '한소네' 위를 오가며 떠오르는 글자를 읽고 있었다.
대학 생활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동아리가 먼저 생각났다. 많은 이들의 로망인 대학교 밴드가 아닌, 국악 관현악단에 소속되는 것은 꽤 특이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홍보 글을 보고 홀린 듯이 이 동아리에 들어오기 전까지 주변에 국악하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풍덩, 이 삶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응당 아이들에게도 이 재미를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야금이 얼마나 예쁜 소리를 지닌 악기인지, 현과 현을 노니는 게 얼마나 멋들어진 행위인지 설명하면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지 살펴보았다. 눈을 빛내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어 덩달아 나도 신났다. 어때, 배우고 싶지 않니, 학교에 가야금이 있다면 선생님이 가르쳐줄게, 아니면 나중에 악기를 가져올 수도 있어, 얘기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망설이면서 대답했다. 사실 가야금은 배우고 싶지만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달래주었다. ‘처음 악기를 해보는 거라 어려울 것 같아서요’라는 말이 돌아올 줄 알았다. 처음은 누구나 어려운 거야, 선생님도 배운 지 몇 년 안 됐어. 돌아온 대답은,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가야금을 배우면 굳은살이 생겨서 점자를 못 읽을까 봐 걱정돼서요.
그 말에 생각에 빠졌다. 노력의 증거를 굳은살에서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발레리나의 울퉁불퉁한 발, 기타리스트의 까슬한 손은 그 자체로 노력의 산물이다. 아픔을 견딘 손이 어떠한 증명이라고 믿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만난 아이들의 깨끗하고 단정한 손가락에는 반복에 무뎌지지 않도록, 작은 점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던 시간이 새겨져 있었다. 굳은살이 없어야만 가능한 감각이 있다. 마냥 단단해지기만 할 게 아니라, 부드럽게 매만지며 하나씩 짚어 봐야 할 때가 있다.
풍파를 견디며 두터워진 껍데기 속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분명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아픔을 무디게 만드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도,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단단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나 역시 가야금 현을 뜯으며, 더 이상 아프지 않게 연주하기 위해 손끝을 단련하는 법을 익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을 접지 않는 선택도 있다. 끊임없이 세상을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 손을 내미는 것. 그리고 손끝으로 읽어 내는 것. 굳은살이 생기지 않도록 손을 지켜야만 가능한 배움이 있다는 사실을.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 노력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다. 그러나 단단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건 회피가 아니라 용기다. 세상을 더 정확히 읽기 위해, 감각을 끝까지 남겨두는 선택. 점 하나, 미세한 높낮이, 손끝에 닿는 차이를 끝까지 구분해 내는 힘. 그 조심스러움이야말로 새롭게 배운 노력의 형태다. 모든 성장이 거칠어지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필요는 없다. 때로는 말랑말랑함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단해져야 할 때와 부드러워져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도 어떤 손길은 여전히 말랑말랑함을 유지한 채, 닳지 않기 위해 애쓰며 조용히 세상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이제는 안다. 그 말랑말랑함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누가 함부로 그에게 단단해지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