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 대사를 잊었을지라도, 무대에 오를 배우가 없더라도, 백스테이지 운영이 엉망이더라도, 심지어 공습경보가 울리고 폭격 소리가 들려오는 전쟁 중일지라도. 단 한 명이라도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공연의 가치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누군가의 기다림이란 숨을 마시며 생명력을 얻는 살아있는 장르다.
연극 <더 드레서>가 2025년 12월 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했다. 작품은 2020년 초연, 2021년 재연, 2024년 삼연을 거친 후 더 큰 무대로 공간을 확장하며 2025년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2026년 3월 1일까지 공연하는 <더 드레서>는 초연부터 삼연까지 작품을 이끈 장유정이 또다시 연출을 맡았다. 세 시즌 동안 열연했던 기존 배우들을 비롯해 이번 시즌에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까지 역대급 라인업을 자랑하는 작품은, 평점 9.8점이란 뜨거운 호평을 받으며 순항 중이다.
1980년 영국에서 초연된 연극 <더 드레서>는 1983년 동명 영화로도 제작돼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더 드레서>는 1942년, 전쟁 중인 영국의 한 지방 극장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앞둔 베테랑 노배우인 ‘선생님’은 생의 막바지에서도 무대를 놓지 않는다. 생사의 경계를 헤매던 선생님은, 수백 번을 공연한 <리어왕> 대사를 무대에 오르기 직전 잊는다.
설상가상으로 <리어왕>의 다른 역할은 무대에 서본 적도 없는 초짜 대타 배우가 맡게 된다. 젊은 남자들은 군에 끌려가 극단에 남은 이들은 여성이거나, 남성일지라도 몸이 불편하거나 나이가 들어 참전할 수 없는 이들뿐이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건 드레서 ‘노먼’이다. 드레서의 사전 의미는 공연 중 연기자의 의상 전환을 돕고 의상을 챙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더 드레서> 노먼은 의상과 소품을 관리하는 것뿐만이 아닌, 선생님의 컨디션과 마음·생각까지도 제 것처럼 세심히 챙기며 수십 년 세월과 열정을 바쳐왔다.
얼마 안 남은 생을 붙들고 악착같이 무대에 서는 노배우 ‘선생님’ 역은 박근형과 정동환이 연기한다. 한때 배우를 꿈꿨으나, 무대 뒤에서 오랫동안 선생님을 보필해 온 드레서 ‘노먼’ 역엔 송승환과 오만석이 캐스팅됐다. 세 시즌 동안 선생님을 연기한 송승환은 새로운 시즌엔 노먼으로 합류하며 화제가 됐다. 초연부터 모든 시즌을 참여한 오만석 또한 더욱 깊어진 연기와 감정으로 객석에 울림을 주고 있다.
선생님의 연인이자 상대 배우인 ‘사모님’ 역엔 송옥숙과 정재은이 출연하며, 전쟁으로 무대에 설 이가 없어 얼떨결에 배우로 데뷔하는 ‘제프리’ 역엔 송영재와 유병훈이 캐스팅됐다. 무대감독이자 선생님을 깊이 존경하는 ‘맷지’ 역은 이주원이 연기한다. 직설적인 성격인 ‘옥슨비’ 역은 임영우가 또다시 무대에 오르며, 한기장이 같은 역에 새로운 캐스트로 합류했다.
<더 드레서>의 주요 배경은 선생님의 분장실과 <리어왕>이 공연되는 무대 백스테이지다. 작품은 무대 미술과 연출로도 매 시즌 호평을 받았다. 선생님과 노먼의 이야기가 작품 주요 서사지만, 선생님을 중심으로 사모님·제프리·옥슨비·맷지와의 서사와 감정선도 촘촘하게 구성돼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또한 극은 선생님이 왕처럼 군림하는 셰익스피어 극단의 무대 뒤 모습을 묘사하면서, 셰익스피어 <리어왕>과 극중극으로 전개된다. 선생님의 비극적인 현실과 <리어왕> 작품이 묘하게 겹칠 때, 작품의 비극성과 페이소스는 극대화된다.
<더 드레서>는 2020년 초연, 2021년 재연 당시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도 공연을 올리며 작품 외적으로도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거리 두기 좌석제, 연이은 공연 취소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더 드레서>의 행보는 극 중 인물들과도 겹쳐 보인다.
전등이 점멸하듯 의식 또한 깜빡이는 생의 막바지에서도 배우로서 무대에 선 선생님, 그런 선생님을 평생 보필하다 자신을 잃어버린 노먼, 노년에 가까운 나이에도 초짜 배우로 무대에 서며 꿈을 이룬 제프리, 몸이 불편해도 창작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옥슨비, 선생님을 각자의 방식으로 애증하는 사모님과 맷지까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선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삶이란 무대에 오르는 걸 보며 관객은 깊은 공감을 하게 될 것이다. 분장실의 거울처럼, 이들을 보며 자신의 내면 또한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