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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내 이름은 '꾈 유'에 '물가 빈'이다.

    

할머니가 붙여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에 흔히 들어가는 한자는 아니지만, 말 그대로 ‘물가로 꾀어내다ㅡ유인하다’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점은 나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에게 수영을 배워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들었건만, 튜브 위나 잔잔하게 흘러갈 수 있는 유수풀 정도를 좋아했던 나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지만 정말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자랐다고 볼 수 있겠다.


난 누군가를 물가로 꾀어낼 수 없는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깊은 바다에 발을 옮기면 허우적대며 떠내려갈 텐데, 누굴 어떻게 물로 데려올 것인가. 물가로 유인당한 이가 헛웃음을 치겠다. 주변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수영을 할 줄 아는데, 정작 꾈 유에 물가 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수영을 할 줄 몰라서 안타깝게 되었다!


그런데 물가는 어느 순간 나를 꾀어내기 시작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를, 계속 계속.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를 보고 떠오르는 건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바다를 보는 것. 단, 조건이 있다. ‘혼자’ 바다를 보는 것.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난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처음 노트북을 받고 배경화면을 바다로 해 놓았던 기억이 난다. 최근 이 년 동안은 거의 매일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바다 무드등을 키고 지냈다. 생각해 보니 나, 바다를 엄청나게 사랑했나 보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버킷리스트’ 때문에 자연스레 바다가 생각났고,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해둔 바다가 보이는 숙소와 바다 영상을 줄기차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미 난 속초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타는 순간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원하던 일을 이렇게 하루, 아니 한 순간에 결정하고 가버린다고? 뭐 어찌 되었든 이미 버스를 탄 순간부터, 나는 바다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난 길치다. 혼자 여행가는 게 두려웠던 것은 이 이유도 있다. 언제나 여행은 친구들과 갔으니 길을 잃을 일이 없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처음으로 혼자 떠나온 곳이었다. 역시나 오자마자 버스를 잘못 탔다. 삼십 분에 한 대 오는 버스였는데, 목적지가 다른 것 같아 얼떨결에 중간에 내려버렸다.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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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 이러면 길을 잃은 보람이 있지. 푸른 하늘에 푸른 바다, 하얀 점을 찍은 듯 한 번씩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갈매기. 소리를 질러봤자 듣는 이 하나 없을 정도의 고요함. 이 순간 ‘나는 조르바다!’ 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야진 바다에는 조명 하나 없었다. 해가 저물면 칠흑 뿐이다. 밤이 되고 창문을 바라보자 돌무덤에 물길이 부딪혀 백색 파도가 치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것만 보였다. 마치 돌무덤을 잡아먹을 듯이 올라오는 하얀색의 파도. 그리고 나는 거기에 매혹되었다. 줄곧 푸른색의 바다만 열망했지 흑색의 바다는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창문 밖에 꽂힌 시선은 섬뜩한 밤의 파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름다웠다.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더 바람이 분다면, 파도가 친다면 이 건물을 집어삼켜버리진 않을까? 두근거렸다. 이건 무슨 기분일까. 낮의 바다는 날 품어준다는 듯이 잠잠하게 만들었다면 밤의 바다는 날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울렁이게 만들었다. 그래, 낮의 파도는 손을 건넸다면 밤의 파도는 나를 꾀어냈다. 이리로 와 보라고, 원한다면 삼켜주겠다고. 내가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혹여나 할 수 있었다면, 저 꾀임에 넘어가지 않았을까. 어쩌면 내 이름은 ‘물가로 꾀어내다’가 아니라 ‘물가로 꾀어지다’가 될 뻔 했을 것이다.


버킷리스트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생겼다. 밤의 파도는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 이건 두 번째고 첫 번째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이제 혼자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사람이다ㅡ라기보다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버킷리스트를 통해서 말이다.

 

하고 싶은 것은 수없이 많다. 줄줄이 적어내려가기엔 과할만큼. 그러나 열망하던 것은 하나였다. 난 이 행위를 엄청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것' 이전에, 혼자 여행을 다니는 일이 두려웠다. 모든 '처음'에는 두려움이 뒤따르고,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기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눈을 꼭 감고 '버킷리스트'라는 다섯 글자에 나를 걸어보기 전까지.


'당신이 이루고 싶거나 이미 이룬 버킷리스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틀 전엔 전자였고, 지금은 후자가 되었다. 버킷리스트 덕에 생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와 밖에서 바다만 보았다. 기뻤다. 그렇게 원하던 순수한 자유를 여기서 느꼈다. 이 행복한 일을 두려움이라는 글자에 가둬 여태껏 하지 않았다니. 버킷리스트가 아니었다면 몇 년은 더 미뤄왔을 것이라니. 그리고 알게 되었다. 밤의 파도는 아름답다는 것을, 이젠 나 홀로도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에디터 명함 길유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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