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세계의 주인>
무엇을 용서한다는 거지? 주인이는 왜 저러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도 어쩐지 주인공들이 답답하지가 않았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나, 또는 가장 안쓰러운 사람에게 마음을 잘 주는 사람인데도.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마음이 쓰이는 초반부를 지나니 비로소 윤가은 감독의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그 후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기에 <세계의 주인>은 꽤나 발랄하게 시작한다. 남자친구를 자주 바꾸고 친구들과 왁왁거리며 놀고, 반장도 하고, 선생님들께 예쁨 받는 주인공.
그런 사람들을 본 적 있다. 학교 다닐 때, 대학교에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알바를 하면서도.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라는 카라의 프리티걸 bgm이 들리고, 항상 산뜻하며 성격도 좋고 쾌활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들. 그래서 마음이 가고, 때로는 부럽기도 한 사람들. 어떻게 저렇게 구김살이 없지, 어떻게 저렇게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지,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
(이제와서 보니 이런 생각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얕은 생각인지 알게 되었지만 가끔가다 만나는 주인이 같은 사람들을 볼 때면 저런 생각을 했었다.)
주인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눈치로 대충 알 수 있었지만 미도가 용서라는 게 참 어렵다고 말할 때, 주인이 내 인생이 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할 때, 차 안에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며 세차장을 한번 더 돌 때, 남자친구의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좋게 말하는 걸 듣고 있을 때,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폭력 피해사실을 이야기한 후 묘하게 피하는 느낌을 받을 때. 주인의 동생이 평소에는 팔라아치처럼 마술쇼를 선보이다가도 삼촌에게 온 편지를 침대 밑에 숨겨둘때. 그 아이의 마술이 실패해서 결국 사라지지 못한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왔을 때. 영화에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장면들은 현실적이고,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다루는 카메라의 방식이 그대로 두는 것이라는 점까지. 그을린 벽을 덮지 않고, 그 벽에는 주인이 있다고 말하는 관장님의 마음과 스스로 괜찮아질 때까지 깨끗한 차로 세차장을 뺑뺑이 도는 엄마. 지켜봐줌으로써 회복은 본인의 몫이라고 말하지만 옆에서 누구보다 함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오는 중인 이 영화의 모든 주인들은 사실 정말 괜찮아지지 않았고, 그렇지만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고, 하지만 자신의 괜찮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괜찮음을 증명해야 했다. 피해자다움에 대해 강요하는 것들을 거부한다. 아직 완벽하게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으며 나는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말한다는 건 스스로를 매번 증명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렇게 강요당하고 스스로 괜찮음을 증명해야하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내비친다. 주인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들로 인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에게 몰래 온 편지는 주인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을 믿고 싶어하는 또다른 주인들의 목소리다. 정말 괜찮냐고, 가짜가 아니냐고 물음으로써 여전히 괜찮아지지 않은 자신도 괜찮아질 수 있겠냐고 묻는 그 마음이 영화 내내 남아있다. 아직 완벽하게 괜찮아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괜찮아지고 있는 주인을 보는 익명의 편지는 나아가며 자신의 세계 속 주인이 되어가는 주인을 보며 나도 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다.
현실에는 아직 주인처럼 나아지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느 날 이후로 익명 편지의 주인공이 되어 세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괜찮아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목소리들을 영화에서 마주했고, 이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윤가은 감독과 서수빈의 세상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영화의 주인이 처럼 다른 모든 주인이들도 더 더 괜찮아졌으면 한다. 영화가 끝나도 그 안에서 계속 나아지고 나아가기를 바라게 되는 마음이 크레딧의 끝까지를 보게 만든다. 뭐든 한입 크게 먹고 와하하 크게 웃고 그렇게. 세계를 자신으로 가득가득 채워나가며 주인이 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