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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영화 <지옥만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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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학교폭력, 자살, 사이비, 폭행 등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교사를 잘못 만났다.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대입에 불이익을 주겠다며 협박했다. 고압적인 태도로 학생을 찍어 눌렀다. 어느 날 폭언을 듣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나머지 숨이 안 쉬어지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랬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하다가 보건실로 기어가 쓰러졌다. 수시 원서를 작성하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그날 이후로 수능을 보기 전까지 폐인처럼 사는 내 모습을 본 부모님이 신고라도 하자던 걸 말렸다. 대학에 못 갈까 봐.
수능 전날, 담임이 교실에서 모두 함께 원을 두르고 서서 손을 잡자고 했다. 그러더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이 수능을 잘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경건한 그 시간에, 의문이 들었다. 그토록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 나와 친구들에게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던 그날에도 그랬을까? 자기 전 매일 기도를 한다던 그 사람이 역시나 회개 기도를 올렸을까? 진심으로 반성했을까? 설령 그랬더라도, 나는 아직 그때의 상처가 남아 있는데 내 지옥같던 시간은, 나는. 도대체 누가 구원해주나. 종교가 뭐길래. 누가 그들을 용서하는 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23년, 비슷한 시기에 나와 같은 물음을 가진 이들이 극장에 나타났다.
어차피 죽을 거, 기스라도 내야 하지 않겠냐?
나미와 선우는 고등학교 내내 학교 폭력을 당한다. 돈과 전자기기를 뺏는 것은 물론, 가장 기뻐야 할 생일 날에도 선우를 불러내어 생일 축하를 명목으로 얼굴에 케이크를 처박는다. 나미는 선우에게 일어나는 일이 폭력이라는 걸 알지만 자신이 당하기 전에 얼른 주동자 채린의 편에 선다. 그러나 채린은 나미마저도 폭력의 희생자로 추락시킨다. 나미와 선우는 이런 삶은 의미가 없다며 죽음을 결심하고, 함께 실행하기로 한다. 거사는 반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간 그날, 폐목욕탕에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인 그때, 나미는 채린이 이사를 간 후 서울에서 유학을 준비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에서 돌아온 나미는 선우에게 말한다. 채린을 찾으러 가자고.
그들은 과거를 세탁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을 채린의 인생을 망치기 위해 지금 채린의 주변에 있을 사람들에게 그녀의 본성을 고발하기로 계획을 짠다. 무턱대고 떠난 서울에서 가까스로 채린을 찾아내지만,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허름한 교회에서 마주친 채린이 환하게 웃으며 나미와 선우를 반긴 것이다. 교회 사람들도 이상하다. 모두가 채린을 부러워하며 축복이 찾아왔다는 말만 반복한다. 구석진 방에서 삼자대하자 채린은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자신은 이미 회개했으며, 지금 나미와 선우가 찾아온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과 하고 싶다는 기도에 응답하신 거라면서. 나미와 선우는 어이가 없다. 피해자인 자신들은 삶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정작 그 가해자는 이미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게. 허락하지 않은 사과에 응답을 준 이가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까지.
믿음의 반의어는 사실
이 영화의 감정선을 이끌고 뒤흔드는 것 모두 믿음이다. 영화 초반, 채린의 편에 서면 배신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나미의 믿음은 깨진다. 나미와 선우가 채린을 찾아가 채린의 인생에 기스를 내기로 했던 것도 나미의 "나만 믿고 따라오라니까?" 한 마디에 시작된다. 채린의 과거를 이미 교회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자, 계획이 성공할 거라는 믿음도 틀어진다.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라도 기스를 내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그러나 그 계획마저도 마지막까지 망설이는 나미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고. 나미는 점점 채린의 진심에 가까워진다.
선우는 채린을 믿지 않는 동시에 교회에서 자신처럼 괴롭힘당하는 혜진을 발견한다. 혜진은 낙원으로 가기 위해 봉사 점수를 열심히 모아야 한다. 자신을 자꾸만 괴롭히는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자 교회의 인솔자 명호는 혜진이 함께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의심하는 걸 보니 마귀가 들었다며 오히려 혜진을 의심하고 몰아간다. 혜진은 제발 봐달라며 싹싹 빈다. 여기서 영화는 믿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을 들추는 것을 거부한 채 덮어놓고 믿기만 하는 것이 진실일까? 믿음에 있어서 옳은 태도는 무엇인가?
낙원에 계신 목사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결국 봉사 점수가 제일 높은 채린의 낙원행이 결정된다. 이는 채린과 명호의 부적절한 관계가 미리 암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분노한 혜진의 아버지가 항의하러 찾아오자, 명호는 실수로 목사님이 수감 중이라는 사실을 밝혀버린다. 말다툼 중 참지 못하고 혜진 아버지의 머리에 상해를 입힌 명호는 도망가고, 채린은 그런 명호와 만나기로 했다며 명호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구마 의식을 명목으로 갖은 폭행을 당한다. 마지막까지 명호가 돌아올 거라 믿은 채린은 나미와 선우가 명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자, 자신이 갇혀있던 창고에서 나온다.
유유히 빠져나오던 그들은 창고에 불을 지르고 이전의 교회 행사에서 사용했다는 폭죽으로 마지막 장식을 한다. 나미는 자살을 기도하던 초반과는 달리, 이번에는 번개탄을 탈출과 복수에 사용한다. 어른들이 망연자실한 채 불꽃놀이를 지켜볼 때 나미는 춤을 추며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과의 안녕을 고한다.
구원으로의 수학여행
자칫하면 내 용서가 구원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나미와 선우는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된다. 내일도 만나자는 흔한 말 대신 나미는 선우에게 말한다. "웰컴 백 투 헬이다, XX!"
영화 곳곳에 녹아든 복선을 깔끔하게 회수한 것은 통쾌하지만, 이 영화는 사이비와 사회 고발 영화에 더 가깝기에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을 맺지 않고 끝난다. 물론 종교와 도덕 사이의 비정형적인 선을 담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영화가 영화이기에 가능한 세계가 있다. <지옥만세>가 담아내는 선과 악, 낙원과 지옥의 관계가 기존의 관념에 태클을 걸면서 시작한 만큼, 다른 전개가 펼쳐졌더라면 어땠을지도 상상하게 하는 맛이 있다. 조심스러웠던 나머지 좀 더 직설적으로 파멸을 향해 걸어가도 좋을 법한, 약간의 아쉬움이 남지만 좋은 평가를 주고 싶은 영화였다.
명호를 믿은 채린, 채린을 믿은 나미, 나미를 믿은 선우가 각각의 믿음에 배신당하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고한다.
불확실한 타인을 믿는 낙원 대신 자신을 믿는 확실한 지옥으로 걸어가는 게 때로는 죽음보다 이롭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