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56번째 소설, 위수정 작가의 『fin』은 네 남녀가 각자의 고통을 숨긴 채 역할극을 펼쳐내는 이야기다.
배우 ‘기옥’과 ‘태인’, 그리고 그들의 매니저 ‘윤주’와 ‘상호’는 삶과 연극 사이에서 각자가 갈망하는 현실을 향해 위태롭게 나아간다. 끝을 알 수 없는 결말로 달려가는 과정에서 삶은 연극처럼 반복되고, 무대는 현실에 스며든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배우 ‘기옥’과 ‘태인’은 스캔들과 논란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화려한 껍데기만 남은 채 배우로서의 막이 끝나기 전, 둘은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에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자신의 상황과 닮아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둘은 무대 위에서만큼은 비로소 자신이 꿈꾸던 ‘현실’에 닿은 듯한 감각을 얻는다.
그러나 우울증과 불면증, 알코올 중독과 폭언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매니저 ‘윤주’와 ‘상호’는 그들이 일궈낸 삶을 동경하면서도 혐오한다. 무대 위의 찬란한 모습과 대비되는 파괴적인 일상이지만, 그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질투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기옥’은 ‘윤주’,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젊음을 부러워한다. “선생님만큼 성공한 사람이 몇이나 되게요. ”라며 위로를 건네는 ‘윤주’의 말에, ‘기옥’은 “나는 실패야. 실패작. ”이라며 자조적인 언행을 내뱉는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성공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 채 약물에 의존해 잠을 청한다.
한편 ‘태인’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한 매니저 ‘상호’ 앞에서 마감한다. 단 하나뿐인 관객에게 “내 눈이 이 모든 피날레를 담도록 내버려두기로 하고 나는 퇴장한다. 박제된 광대로서, 커튼콜이 없는 세계로. 박수도, 야유도 없이. 가족도, 신도 없이... 암전.”이라는 독백을 건네며 막을 내린다.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었던 꿈을 접고 대배우 곁에 서기를 택했던 ‘상호’에게 그의 허망한 죽음은 좌절이었을까, 혹은 연극에서 벗어나는 해방이었을까.
‘기옥’과 ‘태인’이 무대 위에서 삶을 연기했다면, ‘윤주’와 ‘상호’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연기를 펼쳤다. ‘윤주’는 ‘기옥’을 위하는 척하다가 결국 진심으로 그를 위하게 되었고, ‘상호’ 역시 ‘태인’의 무리한 요구 앞에서 본심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게 거짓은 반복 속에서 진실의 탈을 쓰게 된다.
그래서 ‘태인’의 죽음 이후, ‘상호’가 잠시 역할극에서 벗어나 본심을 드러냈을 때 ‘윤주’는 당황한다. 늘 차분해 보이던 ‘상호’는 그의 죽음에 관해서 의심받자 “내가 바보야?”라며 날을 세우고, 그때 ‘윤주’는 깨닫는다. 연기를 하는 것은 배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저마다의 무대에서, 저마다의 배역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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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네 삶을 연극에 비유한다. 삶 역시 컷이나 NG가 불가능한 연극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연극처럼 끝나는 삶이란 없는 듯이 그렇게 살고, 연극처럼 시작되는 죽음이란 없는 듯이 그렇게 죽는다. ”라는 해설처럼 삶은 끝이 아니라, 커튼콜 없는 암전을 거쳐 또 다른 무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