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상에서 ‘충청도식 화법’이 밈이 되어 주목받고 있다. 상대방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전하지 않고, 은근슬쩍 돌려 말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와 같이 완곡어법에 의미를 유추할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로부터 유머를 느낀다. 비유는 아름다운 시에서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재밌는 우화에서 교훈을 주기도 한다. 또는, 회화에서 시각적인 기호로 작동하며 많은 의미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미국 화가 래리 피트먼도 비유를 작업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는다. 전시 《카프리초스와 야상곡(Caprichos and Nocturnes)》에서 선보이는 시리즈인 〈카프리초스〉와 〈야상곡〉 시리즈도 그러하다. 캔버스 화면을 가득 채운 각종 선과 도형은 각각이 열려 있는 기호로서 작동한다. 게다가 이러한 요소들은 피트먼만의 독특한 필선과 구성 방식으로 장식적인 미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피트먼의 회화에서 상징과 장식미가 동시에 드러나는 것은 그가 자란 문화적 배경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미국인 아버지와 콜롬비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콜롬비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 멕시코 시티에 자주 머물기도 했다. 다문화의 정체성은 장식과 은유라는, 접점이 보이지 않는 두 형식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역량이 되었다.
〈카프리초스〉 시리즈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로부터 유래한다. 이 판화집은 당대 스페인 사회의 부정부패와 타락을 가감없이 고발하는 작품이었다. 피트먼은 이를 참고하여 사회비판적 요소를 캔버스에 담아내면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기호화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복합적인 층위의 해석을 유도한다.
또한, 작가는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학으로부터 인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카프리초스〉 시리즈에는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의 시를 빌린다. 디킨슨의 시는 개인의 감정과 내면, 삶과 죽음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작가다. 피트먼은 시를 통해 작품의 주제를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장식적이고 밀도높은 기호들로 가득찬 화면이기에 그것을 완전히 펼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카프리초 #8〉(2015)은 1862년경 쓰인 디킨슨의 시 “그들은 눈송이처럼 떨어졌고(They dropped like Flake)”의 구절들이 화면 곳곳에 쓰여 있다. 구절들은 말풍선처럼 위치하기도 하고, 프레임이 되어 특정 구역을 둘러싸기도 한다. 인간의 형상들은 머리, 팔과 다리 등 한 부분이 돋보이고 온전한 하나의 신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실과 같은 선에 묶인 채, 고통을 신음하는 모습에서 불편한 감정을 전달한다.
여기에 사용된 시는 남북전쟁의 비극과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목숨, 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여겨졌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떠올릴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과거에 경험한 정치적, 사회적 폭력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것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몫이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 〈카프리초 #5〉(2015)는 역시 화면 곳곳에 쓰인 시는 디킨슨의 “재는 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Ashes denote that Fire was)”를 인용한 것이다. 불은 스스로를 태워 빛과 열을 주고 결국 재가 되어 남는다. 재에게 존경을 표하는 행위는 한 때 소중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서도 잊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카프리초스〉 시리즈가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사회비판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면, 〈야상곡〉 시리즈는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야상곡 #6〉(2015)과 〈야상곡#9〉(2015)는 모노톤의 화면에 직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형상들이 부유하고 있다. 마치 우주 공간에 반짝이는 별들을 뒤로 한 채 고요한 침묵 속에서 떠다니는 듯 하다.
‘야상곡’이라는 음악적 형식을 시각적으로 번안한 이 시리즈는 불안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밤의 성격을 비추면서 꿈 속 세계와 같은 몽환적인 풍경을 펼친다. 화면 여기저기 보이는 알들은 깨어날 준비를 하는 생명의 형태로서 회복과 재생, 순환을 암시한다.
온갖 도상들이 가득한 화면 앞에서, 우리는 시선을 바삐 움직이며 그 의미를 파헤치려 몰두하게 된다. 거기에 정해진 답은 없다. 피트먼이 언급했듯이, 상징(symbol)은 닫힌 체계이지만, 은유(metaphor)는 열려 있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은유로서 보편적인 감정과 개인적인 감상을 동시에 존재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