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2일, ‘가장 현대적인 지휘자’라 평가되는 앨런 길버트가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NDR 엘프 필하모니를 이끌고 한국을 찾았다. 이번 <앨런 길버트 & NDR엘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함께하여 압도적인 힘과 유려함, 신선함과 자유로움이 공존하는 무대를 선사했다.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 시절부터 현대음악에 비중을 두었던 앨런 길버트는 이날 역시 공연의 첫 곡으로 현대 작곡가 안나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 (The Weaving Sea)>를 선택하며 자신의 음악적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해 보였다.
미국의 흑인 여성 시인이자 인권운동가인 오드리 로드의 시 「여성은 말한다(Woman Speaks)」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세계 속에서 불분명했던 여성의 존재와 여성의 힘을 표하고자 한 작품이다.
“내 마술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가 물러갈 때, 그것은 나의 형상을 남길 것이다. 나는 머물지 않는다. 내 탄생이나 신들 속에서도 나는 불멸이며 반쯤 자란 존재, 그리고 여전히 찾는다...(중략)”
음악은 시작과 동시에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연주자들은 목소리와 악기, 발구르기 등 가능한 모든 형태로 강력하고 원초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내 마술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가 물러갈 때, 그것은 나의 형상을 남길 것이다. 나는 머물지 않는다." 시의 문장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밀려나고 다시 힘을 얻는 리듬은 넘실대는 파도를 연상시키며 순식간에 공연장을 리듬으로 요동치는 바다로 내보냈다. 생명의 꿈틀거림을 떠올리게 하는 밝은 선율과 불분명한 여성 존재를 드러내는 듯한 비애감 짙은 선율이 교차하며 거대한 파도와 같은 무한한 힘, 신화적인 힘을 구현해 낸 음악은 탄성과 기립으로 끝날 때까지 강렬한 충격을 지속했다. 신선한 충격을 안긴 이 곡은 앨런 길버트와 엘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방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완벽한 서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부는 세계적인 연주자 조슈아 벨이 함께 하여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Brahms Violin Concerto, Op. 77)>을 들려주었다. 첫 번째 악장의 밝은 듯하면서도 절제된 긴 제시부가 끝나고, 드디어 벨의 솔로가 시작되었다. 솔로 바이올린이 화려하게 나타나는 이 곡에서 과연 세계적인 연주자가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그 기대가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자유롭고, 화려하면서도 결고 가볍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감성과 테크닉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이 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연주는 그의 세계적인 위치를 실감하게 했다.
2악장은 1악장과 동일하게 벨의 솔로 바이올린의 유려한 선율이 앞선 주제를 변주하며 전개되었다. 곡의 치밀한 구조와 더불어 솔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완벽한 호흡은 이 곡이 협주곡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처럼 느껴지게 했다. 벨은 아주 여린 부분을 지키면서 동시에 전체 앙상블과 끊임없이 호흡했다. 그의 몸짓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주고받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걸고 다시 답하며 무대를 완전히 이끌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3악장에 접어들면서 음악은 집시풍의 활기찬 리듬으로 전환되었다. 벨의 솔로 바이올린은 전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화려하고 빠른 음들을 전혀 부담 없이 소화해 냈고 브람스 특유의 고상하면서도 친밀한 뉘앙스를 표현해 냈다. 브람스는 이 곡을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의 조언을 받으며 작곡했는데, 특히 3악장은 요아힘의 뿌리인 헝가리적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이국적인 정서가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악장이었다.
"페스트(헝가리 부다페스트)역에서 상경하는 시골 사람들을 나르는 기차가 프라하 역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새로운 교향곡의 1주제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 안토닌 드보르자크
마지막 3부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7번(Dvořák Symphony No. 7, Op. 70)>이었다. 브람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드보르자크는, 이 작품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왈츠풍 양식과 체코 민속음악을 조화시키며 자신만의 색채를 드러내고자 했다. 첫 악장은 어둠이 드리우는 듯한 장중한 오케스트라로 시작해, 드보르자크 특유의 강한 이국 정서와 자유로운 선율을 펼쳐 보였다. 문득 스메타나의 선율이 스쳐가는 듯하기도 했던 것은 교향곡 전반에 깔린 강한 체코 정서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드보르작은 이 곡을 출판할 때, 자신의 이름을 안톤이 아닌 ‘안토닌(Antonín)’으로 표기하려고 했던 만큼, 곡에서 강한 애국심과 체코의 민족적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2악장은 앞선 악장의 비극적 정서와 대조를 이루면서,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한여진 수석 플루티스트의 환상적인 선율이 빛을 더하면서, 소박한 자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분위기를 그려 보였다.
3악장은 민족 춤곡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리듬으로 전환되면서, 토속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마지막 악장으로 들어서면서 음악은 다시 1악장의 비극적 정서로 회귀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로 치달았다. 지휘자 앨런 길버트는 두 팔로 큰 원을 그려가며 지휘했고 오케스트라는 더욱 웅장한 소리를 내며 이에 반응했다. 팀파니의 강한 울림은 전체를 끌어올리고, 마지막에는 장조로 전환되며 음악은 어둠에서 환희로 나아가는 듯한 장엄하고도 열정적인 피날레로 완성되었다.
언제나 ‘혁신’, ‘새로운 물결’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지휘자 앨런 길버트는 이번 무대에서도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를 증명해 보였다. 이 신선함과 새로움은 단지 현대 작품에 비중을 둔 프로그램 구성에서 오는 것이 아닌, 최고의 음악을 위해 소통하는 그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최고의 연주는 단원들과의 '소통'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그는 모든 곡을 암보로 지휘하며 매 순간 오케스트라와 대화하고 호흡하며 다양한 예술적 잠재성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음악은 열정적이고 풍부하며 자유롭게 살아 움직였다. 살아 움직이며 스스로 말하는 음악은 언제나 이해하기 이전에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음악 속에서 관객들은 안나 클라인으로 시작해 드보르자크까지, 음악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요동치는 항해의 여정을 이번 무대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PROGRAM
Anna Clyne Restless Oceans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Op. 77
Brahms Violin Concerto, Op. 77
I. Allegro non troppo
II. Adagio
III.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Op. 70
Dvořák Symphony No. 7, Op. 70
I. Allegro maestoso
II. Poco adagio
III. Scherzo. Vivace
IV. Finale. Alleg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