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극이 오르는 극장은 파리 외곽 지역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지역, 생드니에 위치해 있다. 시위의 일번지이자 불법체류자들이 점거한 동네. 그 곳에 현대극을 다루는 극장이 있다고 하니 '날 것'의 무언가를 기대하게 된다.
만연한 캣콜링과 인종차별을 뒤로 하고 들어온 극장은 예상 외로 연식이 있어 보인다. 안내에 따라 공연장으로 입장하니, 좌석 아래 구조가 훤히 보인다. 결이 드러나는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객석은 벌써 '날 것'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킨다. 쭉 들어가니 무대 바로 앞. 눈앞에 보이는 세트의 측면은 왠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몰래 본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괜히 흘긋 흘긋 바라본 세트는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아도 될 만큼 현실 고증이 잘 된 70-80년대 아파트다. 입구 쪽 측면은 화장실의 자리였는데, 나중에 극이 진행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실제로 물이 나온다! 대체 세트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것인가.
각설하고, 빈 자리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한눈에 보이는 무대 구성은 화장실, 그 옆의 거실, 그 옆의 침실, 그리고 가장 뒤쪽의 작은 주방이다. 넓은 거실을 뒤로 하고 무대 앞쪽에는 관객들을 바라보는 9개의 각기 다른 의자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배우들은 인터뷰하러 온 지원자마냥 정자세로 앉아있다. 다채로운 색감의 세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주황색과 옥색이 배우들의 옷에 자연스레 스며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유행을 그대로 재현한 레트로 스타일링과 실내라는 배경에 걺자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색감이 두드러진다.
세트를 눈에 담고 있으니, 쨍한 오렌지색 니트를 입고 수첩을 든 여자가 무대 밑에서 등장한다. 그녀의 역할은 기사 작성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러 온 젊고 열정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아키비스트. 원작 소설의 작가인 알렉시예비치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세계 2차대전을 겪은 9명의 증언자를 관객에게 소개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극을 시작한다.
"여자에게 전쟁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질문을 받은 9명의 여성은 담담하게, 때론 격앙된 어조로 전쟁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풀어낸다. 스탈린에 대한 입장 차이는 꽤 격동적인 토론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총을 쏘고 명령을 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니라 공포, 상실, 고독, 슬픔, 사랑과 같은 감정을 중심으로 전쟁을 기억한다. 남자처럼 머리칼을 짧게 자르고, 치마 대신 군복을 입고, 전쟁통에 첫 생리를 경험한 그들의 이야기는 일상이 한순간에 뒤바뀐 후의 당황과 혼란을 적나라하게 전달한다. 그걸 듣고 있으니, 극장을 나가면 당장이라도 그들이 겪은 일이 내 일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잇대가 비슷한 여성들은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고, 노이로제 걸릴 듯 들은 군가를 함께 부르고, 직접 보고 겪은 사건을 한 목소리로 뱉어낸다.
"이렇게 할 말이 많은데 왜 침묵했나요?"
한바탕 논의가 끝나자 화자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목소리를 내지 않은 여성들을 비난하는 것 같은 발언에 흠칫하지만, 이어지는 여성들의 답변 역시 예상을 벗어났다. 이들이 발언하지 않았던 이유는 '힘이 없어서', 혹은 '시도했으나 주목받지 못해서'일 거라고 속단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다른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가장 컸다고 답한다. 전쟁이 남긴 참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지만, 세월이 조금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입밖으로 꺼낼 수 있는 정도. 여전히 전쟁의 기억을 나누다 목소리를 높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전쟁을 증언하는 것'의 고통을 짐작해 본다.
관람을 마치고 일주일 뒤, 교수님께서 출연 배우 중 두 명을 초빙해주신 덕분에 일명 '오프 더 레코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극장에 입장하면서 세트 측면을 눈앞에서 보던 것처럼 생경한 느낌이다. 40-50대 여성을 연기하던 두 배우의 실제 모습은 전쟁의 참상을 말하는 데 주저없이 앞장설 것 마냥 당차고 정열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이들이 다만 주어진 배역을 공부하고 대사를 외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실상 작가와 '함께' 극을 만들어 간 사실이다.
소설 기반의 극이므로 확실한 키워드 몇 개가 존재했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배우들과의 심층 인터뷰에서 그들의 삶과 캐릭터의 삶을 비교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비슷한 키워드로 묶여진 배우와 캐릭터에, 실질적으로 역할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실존 인물처럼 완성한 것은 배우들 스스로다. 직접 대사를 쓰기도 하고,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정말 그 사람이 된 양 즉흥적으로 대사를 치기도 했음을 회상한다. 어쩐지 현실적이더라니. 이런 식의 연극 준비는 그들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다고 한다. 기본적인, 그러나 극을 이끌어가기에 충분히 확실한 질문 몇 개를 토대로 매 회차 다른 대사로 관객을 맞이했다. 이러한 경험은 공연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이들을 두 개의 자아로 살게 했다.
프랑스어 원제를 직역하면,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편이 좀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필자는 제목의 문장을 현재형으로 의역해야겠다. 무기와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이야말로, 남녀의 역할이 확실하게 구분되고, 남성의 얼굴을 한 역사적 사건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현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무력감과 허무함을 준다. 전쟁이라는 대재앙 앞에 그 어떤 사람이 온전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감정적으로 약해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받는다. 만약 이것이 고전적인 여성성의 특징이라면, 어쩌면 전쟁의 피해자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