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결심했을 때가 생각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선택의 무게가 하루하루 날 짓눌렀다. 무언가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새로운 환경에 날 욱여 넣었지만, 동그란 구멍에 어설프게 끼인 네모 블럭이 된 기분에 한참을 괴로웠다. 그건 말하자면 '부적절함'의 감정이었다. 틀을 찢든가, 내 모서리를 깎아내든가. 그 기로에서 나는 선택을 유예하고 일단 버티기로 했다. 불편한 몸을 꽉 끼운 채,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꿈틀대는 방식으로.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뜻밖의 가능성이 피어났다. 어떻게든 끼어 있다 보니, 동그란 구멍의 테두리와 나의 네모난 모서리가 서로를 딱 반씩, 조금씩 긁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구멍은 이제 완전히 둥글지만은 않고, 나 역시 완전히 네모지지 않은 어찌 보면 불완전한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시간과 인내가 만든 가시적인 변화는 목표에 도달해 가는 길고 먼 여정에 잠깐씩 주어지는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선택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곱씹으며 상영관을 나섰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탈북 여성의 삶을 바라보며 문득 애쓰지 않아도 나 자신을 대입하고 있는 것. 그렇게 그에 대한 이해도도, 내 삶의 반경도 한 뼘 넓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적 경험'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영화 <하나 코리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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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둔 채 홀로 탈북한 '혜선'. 대한민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국정원 관계자들과 면담을 하고, 불편한 신체검사를 끝내고 짐짝처럼 실려가는 혜선의 눈에는 두려움과 굳은 심지가 동시에 서려있다. 혜선의 과거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여느 탈북자들처럼 트라우마틱한 사건을 겪은 듯한 암시가 나온다. 그런데도 버텨낸 이유는 북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보내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이다. 간호사가 되고 싶은 혜선은 하나원에서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더 어려운 길인 입시에 뛰어들고, 알바를 하며 돈을 마련하는 바쁜 삶을 영위해간다.


말투로 인해 차별적인 시선에 노출되고, 여성임으로 인해 성범죄의 대상이 되면서 혜선은 자신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실감한다. 어머니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의 나레이션은 혜선의 감정을 담담하게 전달하지만 혜선의 안에 거친 소용돌이가 불어닥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몰래 챙겨 보던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이곳의 풍경은 예상보다도 더 각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야 한다는 것을 아는 혜선의 표정에는 언제나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물살을 따라 헤엄치는 것보다 그것에 저항하며 버틴 채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음을, 혜선의 발자취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부적절함'의 감정에 대해 재고할 수 있다. 틀을 찢을 수 없으니 혜선은 누구보다 성실히 자신의 모서리를 깎아간다. 자신을 조선족이라 칭하며 더 잘 끼워맞춰질 것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시간도 쪼개가며 노동을 하고 공부를 해도 그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하는 속삭임을 듣는다. 내가 있을 곳은 내가 정하면 된다는 지난 날의 포부와는 다르게, 그것은 혜선을 자꾸만 위축되게 한다.

 

그러나 혜선이 처음으로 다른 가능성을 보는 것은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후이다. 어렵게 마련한 약값은 어머니에게 닿지 못하고, 내내 말이 적던 혜선은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직접 발화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간호학과 실습생이 된 혜선은 환자에게 '말투가 익숙하다'는 말에 '북한에서 왔다'고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겪어가며 무거운 책임감을 애써 내려놓은 혜선은 그제야 다른 가능성, 즉 틀과 자신의 모서리 모두를 조금씩 갈아가는, 새로운 틀과 본질은 남긴 채 새로운 변화를 해내가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간호사라는 진로 선택은 여전히 어머니의 영향이지만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해나가는 의지는 혜선 본인의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특히 울림을 지닌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보통 탈북을 소재로 한 영화라면 처참한 탈북 과정을 묘사하는 게 주를 이루는데 <하나 코리아>는 조금 다른 접근을 취한다. 뚜렷한 플롯 없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선의 삶을 그저 바라본다. 직접 개입하지 않고 반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응시하는 듯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그 시선은 관객이 침입할 수 있는 틈을 남겨둔 채로 지긋이 바라본다. 바라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감독은 '혜선'이라는 탈북 여성의 시선으로 대한민국 사회 구조를 응시하고, 이방인들이 삶의 자유를 획득할 때 겪는 난관들을 조명하고 싶었다는 연출 의도를 밝혔다. 해당 영화를 연출한 프레드릭 쇨베르 감독은 덴마크 출신으로, 훌륭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평단에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덴마크의 백인 남성으로 살아온 그가 경험해본 적도 없는 탈북 여성의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영화에 담고자 결심한 것에는 분명 많은 고민과 용기가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 사실이 무색하게도 영화 내에서 불편한 시선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필모그래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실제 탈북 여성들의 삶을 십분 반영해 세심한 리얼리티를 추구한 이 영화만의 톤앤매너가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또한 한국 사회에 속해본 적 없는 제3자의 시선으로 본 서울의 풍경이 혜선의 시선과 묘하게 맞물리며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혜선이 아르바이트 동료와 함께 퇴근하는 장면이다. 능숙하게 일처리를 해내는 동료는 알바비를 모아 세계 여행을 가겠다는 포부를 드러낸다. 한국 사회가 잘 맞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혹여나 일이 잘못되면 다시 돌아와서 부모님 집에 빌붙어 살면 되지 않겠냐 우스갯소리에 혜선은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동료에게 살던 사회를 떠나는 것은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를 짚어낸 결정이다. 그러나 혜선에게 북한을 떠난 것은 생존과 존속, 죽음과 가난 사이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양쪽 다 선택이라면 선택이지만, 선택 가능했던 가짓수가 다른 것이다.

 

문득 혜선이 남한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모든 과정이 '선택의 가짓수를 늘려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온 월급은 오로지 약값으로만 쓰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색의 틴트를 살 수도, 쇼핑몰에서 예쁜 옷을 살 수도, 맛있는 음식을 살 수도 있는 일이다. 혜선이 곤란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해 나가는, 때로는 잘못된 선택에 실수하고 또 그에 비춰 스스로를 배워가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픈 마음으로 올라가는 크레딧을 오래 응시했다.

 

영화 <하나 코리아>는 다가오는 7월 8일 개봉해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해당 소재에 관심이 있는 관객은 물론, 새로운 환경 속에 자신을 내던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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