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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중요하다는 3학년 1학기. 나는 전공 9학점에 교양 8학점을 수강 신청했고 그마저도 전공 3학점은 중도 포기를 했다. 14학점, 전공보다 교양을 많이 들은 미친 3학년. 그리고 휴학을 했고,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나의 2025년 1~3분기는 정확히 이렇게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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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이 필요하다고 느낀 지 꼭 1년이 되었다. 작년 10월의 일기를 펴보니 이런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둘 수 있는 것.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

어렵게 사랑하는 것.


나는 원체 생각하는 걸 좋아하고, 어떤 감정을 한 번 느끼면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삼키고 곱씹어야 하는 편이다. 그 결과는 대개 맥락이 불분명한 문장들로 남는다.


1년 만에 한국에서의 모든 일상을 일시 정지하고 도망치듯이 도착한 유럽은 아름다웠다. 블로그에 열심히 여행을 기록할 뿐 일기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모든 잡생각이 사라졌다. 거기서 내가 한 생각이라곤 유럽이 좋다는 거, 내일은 또 어떤 맛있는 걸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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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적한 부둣가에 오래 앉아있을 때, 옆의 외국인 여자분이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나도 괜히 전자책을 빌려 시집을 읽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이었는데

사람들은 우리에게 살 걱정 죽을 걱정을 하라고 한다

별걱정을 다

 

-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中

 

 

그래. 그냥 다 재미있으려고 하는 거 아냐?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하는 짓 아냐? 나는 이제 걱정을 그만 좀 하자고 다짐했다.


유럽에 가기 전 했던 무수한 걱정들은 하나도 현실이 되지 않았다. 크게 병이 나지도 않았고, 소매치기를 당하지도 않았고, 친구와 싸우지도 않았고, 계획도 잘못되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걸 남김없이 다 했고, 하루하루 재미있게 노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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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힘들었던 게 있다면 한국에 가서 맛있는 밥을 좀 먹고 싶다는 거. (유럽의 쌀은 정말 맛이 없다) 내가 원초적인 것에 이렇게 영향을 받을 줄 몰랐다. 귀국하자마자 며칠째 빨간 한식만 먹으며, 시차 적응을 위해 잘 자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 한국인한테는 밥이 보약

밥 잘 먹고

시 쓰든 말든 오래 살아

 

-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中

 

 

시 쓰든 말든 오래 살라는 문장이 참 마음에 와닿았다. 우스울 정도로 머릿속이 단순한 요즘이다. 잘 먹고, 잘 자고, 많이 웃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두고 싶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가라앉으려면 가라앉게 되고, 깔깔 웃으려면 웃게 된다. 시인처럼, 마음의 돌을 깨뜨려 별사탕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그것이 나는 어려운 사랑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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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는 동안 나에 대한 많은 것을 새로 알았다. 사소한 것부터 근본적인 것까지.


그리고 귀국 후 첫 동네 산책을 나간 날, 매일 보던 그 황혼이 문득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멈춰서서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나는 떠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돌아오는 것도 좋아하는구나. 세상에 대해, 나에 대해 아직도 알아갈 게 많다는 것이 기쁘다고.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있더라. 모두 도망치는 연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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