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현정의 '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
악기 연습실은 협소하다. 2평 정도 되는 공간에서 피아노를 둥당거리며 치고 있을 때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뭘 위해서 이 음악을 연습하고 있는 걸까? 취미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지 2년이 되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무대에 서게 될 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을 완곡한다고 해서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생길까? 물론 혼자 연주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가끔 나는 미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스스로 만족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기타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악기도 아니어서 친구들한테 조차 보여주기 힘든데. 나는 평생 2평 연습실에서 혼자 피아노를 둥당거리게 되는 걸까?
그래서 한 번은 아마추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추어라 해도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좋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으나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해볼 수 있을 거니까. 하지만 출전하지 않았다. 그놈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아마추어 피아노 콩쿠르 출전 영상을 몇 개 보고서 나는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평 짜리 나만의 무대에서 피아노를 둥당거리는 거 이상으로 무언가를 시도해볼 생각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 피아노]를 알게 되었다.
거리피아노
서울에는 ‘피아노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인 길거리 피아노가 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공공피아노로, 혜화 마로니에 공원, 마곡 서울식물원, 반포한강공원, 노들섬 등 야외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길거리 피아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2024년이었다. 20대 초반부터 혜화를 자주 돌아다녔지만, 마로니에 공원 무대 한 켠에 놓인 그 피아노의 존재를 바로 인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술경영 워크샵을 들으러 ‘예술가의 집’이라는 곳을 찾았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갖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에너지를 쏟아 붓고서, 나는 모든 힘을 소진하고 야외로 나와 벤치에서 혼자 쉬고 있었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갈색 업라이트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거리피아노’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평일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각이라, 마로니에 공원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심스럽게 피아노로 다가갔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칠 수 있는 곡 몇 가지를 떠올렸다.
‘악보 없이 칠 수 있는 곡이 뭐가 있지’
‘틀릴 확률이 적은 곡이 뭐가 있지’
‘그 중에서도 좋은 곡은 뭐가 있지’
긴장과 계산 속에서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렇게 선택한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환상곡 k397’과 ‘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모차르트 피아노 환상곡 3번'
건반을 슥슥 만져보다가 첫 음을 눌렀다. 또랑한 소리가 들렸다. 건반이 들뜨거나 가볍지 않았다. 관리가 잘 된 피아노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조용한 마로니에 공원, 새소리, 바람이 조금 부는 화창한 봄 날씨였다. 연습실에서 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과 몰입감을 느끼며 조용히 곡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2곡을 다 연주하고 나니, 이미 쉬는 시간은 지나있었다. 아차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몇 아이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실력임에도 내 연주를 들어준 사람들이 몇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로 얼른 들어갔다. 하지만 결코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워크샵을 듣는 내내, 내 뒤에서 음악을 듣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 못쳤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혹시나 이 음악이 좋아서 한 번은 더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주지는 않았을까? 나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했던 느낌을 잊지 못한 채 집에 갈 때까지도 계속 그 순간을 곱씹었다.
그리고 이후, 친구와 망원의 한 가게를 들렀다. 앤틱한 분위기의 가게에는 오래된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 근처를 기웃거리자 사장님이 연주해봐도 된다며 말을 걸었다. 처음 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그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내가 연주한 녹턴 아주 짧게 첨부(....)
연주를 시작하자 가게 입구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스스로도 부족한 실력이라 생각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사람들과 음악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그 순간이 너무도 짜릿하고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내 작은 무대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연결되는 순간이 주는 긍정적인 마음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버스킹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 음악을 타인에게 선보이고 연결된다는 감각만으로도 삶의 많은 순간을 환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서울 곳곳에 위치한 거리 피아노를 찾아 그동안 연습하던 곡을 연주 해보는 것이 삶의 또 다른 이벤트가 되었다. 홀로 연습하던 2평짜리 작은 연습실에서의 감각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곡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얻을 즐거움과 의미를 떠올리면, 나는 다시 연습할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은 언젠가는 합주 멤버를 꾸려 버스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내 피아노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무작정 시작했던 마로니에 공원의 연주를 들어주었던 너그러운 사람들을 떠올리면, 어떤 수준이어도 괜찮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연습실에서 악보를 읽고 건반을 두드리며, 언젠가 또 다른 사람들과 음악으로 마주할 순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