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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좋은 단편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에는 뭐가 있지?”
(…)
“바다.”
(…)
“그럼 바다 끝에는?”
(…)
“세상이지 뭐.”
- 한강, 「붉은 닻」

드넓음과 드높음
세상은 드넓은 만큼 드높다. 그중 우리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건 ‘드넓음’일 것이다. 우리는 마음껏 걸어갈 수 있지만 날아오를 순 없기 때문이다.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드넓음의 제약뿐만 아니라 삶의 제약에서도 벗어나 있을 것이다.
드넓은 세상-육지 끝엔 바다가 있다. 무한히 확장되는 삶의 끝에 죽음이 있듯이. 이서아의 소설 「방랑, 파도」의 배경인 바닷가 마을은 활기가 맴도는 공간이라기보단 ‘인구가 소멸해’가고, ‘관광객도 얼마 오지 않는’(p.65)*쓸쓸한 마을, 인생 막바지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바다와 접한 공간이자 바다 너머로 죽음이 넘실거리는, 말하자면 ‘생사’의 공간이다. 그곳은 ‘아주 많은 생의 역사로 이루어진 곳’(p.68), ‘어떤 방랑객들’은 ‘홀연히 사라지는 곳‘(같은 쪽)이기도 하다. ‘나’는 이 마을에서 ‘백’과 ‘반’을 도우며 시간이 비면 서핑을 하거나 요양원 일을 돕는다.
돌려주려고 애쓰는 이유
바다 근처 요양원에는 마치 삶의 끝에 정박한 것처럼 노인들이 침대에 누워 머물고 있다. 그중 ‘나’가 맡았던 ‘향자 할머니’는 ‘나’에게 ‘반지’와 ‘책’을 선물로 준 사람이다. “안 돌려줘도 돼.”(p.64)라고 말하면서. ‘나’는 내내 그것들을 돌려줘야 하는 건 아닌지 여러 인물에게 묻거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족에게라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품 전문업체와 할머니의 동생으로부터 그 물건들을 가져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결심을 접는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돌려주려고 애썼던 걸까?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이 그렇듯이, 향자 할머니가 생전에 ‘나’에게 말했듯이(“내가 하늘이랑 계약했거든”(p.72)) ‘나’ 또한 드높음, 하늘, 죽음을 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상과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바다에선 죽음이란 심적으로 그리 멀지도 높지도 않은 곳의 일처럼 느껴진다. 평소에도 공터에 앉아 자주 바다를 보곤 했던 ‘나’가 저 멀리 있을 할머니의 외로움을 생각해서 그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했던 것일 테다. 더 이상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자리는 ‘제자리’일 것이기 때문에.

잘 못 돌아오는 이유
한편 ‘나’는 백반 남매에게 서핑을 배운다. 서핑은 파도에 맞춰 보드에 올라타 해변으로 돌아오는 일. 방점은 돌아오는 거에 찍혀 있다. 저 너머로 가지 않고 돌아오는 일. 결국은 잘 돌아와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일에. ‘나’는 번번이 파도타기에 실패한다. “내게 좋은 파도란 없다. 죄다 견디기 힘들고 고달픈 파도일 뿐이다.”(p.80) 번번이 백과 반에게 뒤처지고 보드를 놓칠까 봐 서둘러 서핑 리쉬를 붙잡을 뿐이다. 서핑은 ‘이론을 머릿속에 녹여두고, 파도가 올 때는 그냥 타면’ 되는 일이지만 ‘나’는 ‘보드 위에서 자꾸만 이론을 생각’(p.68)한다. 그 이론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제와도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이론을 의식하는 ‘나’는 그것들에 시달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시달림이 ‘나’를 넘어뜨리는 걸지도 모른다.
백과 반은 ‘나’와 달리 파도를 아주 잘 탄다. “내게 바다는 장소였지만, 그들에게는 온몸으로 일렁이며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생물체였다.”(p.78) 그들은 쉽게 파도를 타고 뭍으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건 아니다. 그들은 ‘슬픔을 들이마신 사람들’(p.65)이다. 백은 아이를 잃은 사람, 반은 ‘망나니’(p.75)로 살다가 여기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들에게 여기 바다는 고향이다. 그들은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여기 온 게 아니라 고향이라 여기 왔고 여기에 있는 거다. 해양구조대가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이유가 ‘바다를 사랑해서 혹은 바다에서 태어’(p.80)났기 때문인 듯이. 그들에게 파도타기는 죽음과 방랑을 기억하는 일, 그것들에 적응하는 일, 그쪽으로 걸어갔다가 파도를 타고 뭍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들에게 파도란 죽음과 방랑을 쫓아주는 바다의 교육이다. 그들은 바다의 교육을 본받아 ‘나’를 교육한다.
망망대해에서 만날 수 있는
파도를 잘 타지 못하는 ‘나’는 보드를 돛단배로 여긴다. ‘나’는 서핑의 본질을 거스르고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을 꿈꾼다. ‘그러면 아주 많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p.82)하고. 나는 뭍보단 바다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어쨌든 간에 보드 위로 올라서야 망망대해로 가든 파도를 타고 뭍으로 오든 할 텐데 ‘나’에겐 전부 힘겹다. 그런 ‘나’에게 백반 남매가 힌트를 준다. 백의 아이가 묻힌 수목장에 찾아가는 길, 나는 백이 아이를 말할 때 가정법을 주로 쓴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말하며 백과 반이 아이가 된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요양원 일이 끝나면 자주 찾는 공터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이 의자가 돛단배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망망대해로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커녕, 향자 할머니가 알려준 화투 룰조차 잊어먹고, 떠오르는 건 향자 할머니의 주름진 손뿐이다. 그래서 오래 서핑 연습을 한 날, 손이 쭈글쭈글해져 할머니 손 같아진 날, ‘어쩌면 나는 이제 모든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p.99)을 한다. 담담해지고 차차 잊어가면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순례가 인간의 일인듯이
서핑 연습으로 기진맥진해서 모래에 누워 해안가와 평행이 된 ‘나’는 하늘에서 거대한 존재가 절을 하듯이 두 손을 바다에 댄 채 엎드려 고개 돌리는 걸 보게 된다. 소설 초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던 ‘나’는 소설 막바지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의 존재를 보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다. 또한 신은 굽어살피지 않으며 인간의 ‘볼품없이’ 작은 크기와 인간이 가진 슬픔의 크기를 확인시켜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장 3절)’라는 말처럼, 그가 나타나서 그가 슬픔이 있으라 해서 슬픔이 생겨난 것만 같다.
슬픔을 주워가지 않는 신과 달리 반지를 주운 ‘나’는 이제 일어나서 제 몸보다 커다란 보드를 ‘생의 무게’(p.100~101)처럼 끌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순례가 인간의 일이란 듯이. 그 순례길엔 돌려주지 못한 책과 반지가, 누군가에겐 선물이고 누군가에겐 분실물이며 누군가에겐 더 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닌 물건들이, ‘나’의 곁이 제자리인 것처럼 맴도는 슬픔과 함께할 것이다.
*이하 괄호는 쪽수 표기. 인용한 책은 김지연, 이서수, 함윤이. 『소설 보다: 여름 2025』. 문학과지성사, 2025.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문학동네, 2015.에서 글의 제목을 빌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