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끝이 보이는 관계에서는 굳이 힘을 써서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질 수도, 분위기를 풀 수도 있었지만 내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원형에 자꾸 빛을 내려쬐다 보면, 순수하게 누군가를 향한 궁금증이 떠오른다. 스몰토크란 무엇일까. 서로의 취미와 일상을 공유하는 일 아닐까.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처럼, 분명 당신도 무언가를 좋아할 것이다.
어째서 그것을 사랑하고 아끼는가? 왜 굳이 시간을 들여 행하는가. 그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신기하다. 소리에게 끊임없이 되묻던 습관이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이유를 찾아보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탐구하는 재미가 즐겁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몰랐던 세계가 선명해지는 순간은 언제나 흥미롭다.
2025년 5월 16일
1. 호기심의 방향
결국 끊임없이 화제를 돌려야 한다. 인생의 고난을 잘 이겨내려면, 상처가 된 기억을 잊으려면, 당장 해야 할 과업에 집중하려면, 그리고 행복하려면. 불현듯 블러 처리되며 ‘과거’로 삐걱-삐그덕- 이동하는 카메라의 받침대를 ‘오늘’에 고정해 놓아야 한다.
다만 연식이 쌓여서 그런지, 스스로 “지금만 보겠다.”라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지나온 길의 긴 실타래를 외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역사로부터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유익하긴 하지만 몇 가지 정도는 떨쳐내고 싶은데, 쉽지 않다. 인생살이는 바보 같은 나를 내내 달래줘야 하는 쳇바퀴다.
그렇다고 계속 휘둘릴 수만은 없다. 좋은 기억도 때로는 오늘의 행보를 주춤거리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던가. 과거의 영광이 긍정적 자존감 형성에 도움은 되겠지만, 안주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꽤나 독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 참 좋았지, 즐거웠어—’ 하며 이전 시점의 나에 쭉 머물러 있으면 행복의 역치가 조용히 올라간다.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내 가치가 유지된다.’ 그러다 당장의 결과가 과거만 못하면 오히려 크게 실망하고 딥블루에 빠진다. 큰 기쁨이 마지막까지 웃음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만, 있던 것도 왜곡해 보고, 쌀가루도 백설기 하나처럼 무거워하는 나다.
그러니 앞뒤를 다 잘라내고 화제를 지금 ‘여기’에 둬야 한다. 가뜩이나 생각이 복잡한데, 이미 사라진 기억들에 꼭두각시 인형놀이를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당장 시선을 확 빼앗아 줄 것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나날이 계속된다.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각자 우선시하는 카테고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누구는 연애, 누구는 취미, 운동, 자기계발, 명예, 종교, 가족 등… 어쩜 이렇게 천차만별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자신 앞에 재미있는 화두를 세워두면 일상은 훨씬 다채로워진다는 걸 한 번 알고 나면, 이 즐거움에서 빠져나오는 일? 그거 참 어렵다.
내가 관심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슈나 행사가 있으면 기꺼이 참여하고, 중요한 소식이 있으면 전 국민이 알아야 할 화젯거리처럼 취급한다. (부풀려보기 챌린지) 그러다 보면 ‘과거’에 맞춰져 있던 시선의 절반쯤이 ‘미래’와 당장의 ‘행복’으로 확 고정된다. 새로운 흥밋거리는 늘 ‘앞쪽’에 있지 않은가.
찾기는 어렵지만 본능적으로 반할 수밖에 없는 대상을 만나면 우리는 쉽게 ‘몰입’한다. 24시간에서 수면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절반 이상을 그곳으로 정조준하고 매일-매일 눈을 맞춘다.
너무 보면 닳는다고들 하지만, 그런 게 어딨나. 예쁜 건 볼수록 기분 좋고, 아껴줄수록 숨겨져 있던 것이 더 맑게 웃으며 빛을 발한다.
내 세상 안엔 무엇이 있을까. 봐도 봐도 질리지 않고, 될 수 있다면 계속 보고 싶은 것들이 ‘클래식’ 안에 몇 가지 있다. 어떤 요소들일까.
소리, 미소, 빛, 긴 선, 시선—그리고 ‘무의식’이겠다.
사실 연주라는 행위 자체가 철저히 계산된 영역은 아니다. 물론 무대 위에 오르기 전까지 어떤 의도를 살리고 어떻게 해석할지를 계획하겠지만, 실제 공연 당일에 펼쳐내는 것은 의식적 준비를 바탕으로 한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소리와 시선 끝에 본인이 드러나는 것이다.
연주자 대부분은 음악과 악기, 그리고 연주 행위를 사랑하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도달한 것이겠다.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분야가 아님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무대 위 일직선상의 조명 아래, 다수의 앞에서 자신의 무지개를 펼쳐낼 기회를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고 연습하는 것이 아닐까.
나와 다른 밝기의 조명 아래 있는 그들이 곡의 끝자락에 지어내던 그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미소를 볼 때면 그들이 참 행복해 보였고, 때마침 나도 행복했다.
속 편한 관객은 표정에 어린 달뜬 긴장감마저도 기쁨의 요소로 여긴다. 원래 사람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남의 이야기에 꽤 관심이 많지 않은가. 내 세상에선 나를 주인공으로 세워 놓으면서도 그 미소 끝을 꽤 길게 잡아두지 않던가. 이 안에서 내게 건네지는 그 따뜻한 노란빛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이 궁금해지고, 나와 다른 이방인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사람을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모습만큼은 ‘거짓’이 섞이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걸 알게 되니 저절로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은 무엇에 몰입하고 있습니까?
2. 심해를 건너며
그래서 〈몰입〉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지난 8월 9일, 작곡가 안성균의 작곡발표회 IMMERSION(몰입)이 푸르지오 아트홀에서 열렸다. 피아노·바이올린·첼로로 구성된 클래식 트리오와 신디사이저를 결합한 퍼포먼스였다.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1번으로 시작해, 안성균의 Piano Trio No. 1 in c minor, Op. 7 초연, 그리고 모스 부호에서 착안한 작품 IMMERSION으로 마무리됐다. 첫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라니, 흥미가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청취의 기회는 스스로 발을 들여놓아야 오는 법이다.
을지로4가역 10번 출구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물 안에 아트홀이 있었다. 공연을 자주 다니다 보니, 아직 가보지 않은 공연장이 있으면 괜히 궁금해진다. ‘푸르지오 아트홀’은 이름조차 처음 듣는 곳이라 호기심이 더 컸다.
넓은 로비가 있는 1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니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티켓을 수령하고, 팔로우 이벤트에 참여해 귀엽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거대한 우주비행사 볼펜도 받았다.
공연 10분 전, 아트홀 내부로 들어서니 특이한 시멘트 냄새가 은은히 퍼져 있었고, 객석과 무대 전체에 스모그가 드리워져 있었다. 공연 연출이라 짐작했지만 순간 ‘불이 난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여서, 내 안위(?)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물론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약 60분간 이어진 무대는 피아니스트 조영훈, 바이올리니스트 정지훈, 첼리스트 최영의 연주로 진행됐다. 처음 보는 연주자들이었지만, 각자 개성 있는 시원한 음색 덕분에 낯선 초연곡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심해 속에서!
심해? 전체적으로 어둑하고 공연장 전체를 감싼 스모그 효과와 바다를 닮은 푸른빛 조명 덕분이었다. 거기에 연주자들 옆에는 바다 속 반짝이는 해조류를 닮은 오브제가 하나씩 세워져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곡에서는 차분하고 절제된 색감이 주를 이뤘지만, 안성균의 신작 피아노 트리오 1번의 8개 악장에서는 각 곡의 분위기에 맞춰 조명 색과 배경이 바뀌었다. 떠올려 보자. 자줏빛, 노란빛, 파란빛… 덕분에 관객은 복잡하게 상상하지 않아도 곡의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첫 곡 쇼스타코비치는 어땠을까. 세 연주자가 만든 소리의 합은 꽤 ‘냉’했다. 합이 차가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일체감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새초롬하게 소리를 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이곳이 바다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묘하게도 쨍한 소리와의 거리감이 불편하지 않았다. 맞물리기보다 앞서 물결을 타듯 흘러가니, 요트 위에서 바다 속 한 구역을 멍하니 구경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 악기는 각자의 결을 살짝 겹치며, 처음의 냉기를 서서히 덮어 갔다.
뜨겁지 않은 집중이 길게 이어졌다. 특히 정지훈의 바이올린 소리는 온난하지 않은 단단한 쨍함이 있었다. 그 옆에서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은 첼로와 피아노가 길을 함께 걸으니, 오히려 색다르고 좋은 조합이 됐다. 이들의 조합은 안성균의 피아노 트리오 1번에서 가장 빛났다.
1악장 시작부, 바이올린이 현 위를 ‘툭-투둑’ 두드리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묘사했다. 앞서 쇼스타코비치에서는 유별나게 느껴졌던 음색이, 이 현대적인 맥락 속에서는 완벽히 들어맞았다.
이어지는 악장들을 들으며,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호흡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걸 느꼈다. 초연곡이 일반 관객의 귀에 선명히 남으려면 각 악기의 개성과 음색이 뚜렷해야 하는데, 세 연주자는 그 차이를 조화롭게 엮어냈다.
3. 몰입의 얼굴
안성균의 피아노 트리오 1번은 총 8개의 악장으로 구성됐다. 1악장은 장중하고 서사적인 프롤로그로 인생의 두려운 시작을, 2악장은 어머니를 그리는 ‘섬집아기’의 선율을, 3악장은 전통과 현실 사이의 상실과 혼란을 ‘아리랑’에 담았다.
4악장은 할머니와의 추억을, 5악장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6악장은 천진한 소년의 창의를, 7악장은 바다 속 감정의 파동을, 8악장은 지나온 기억을 되짚었다.
중간의 2악장과 3악장은 한국인에겐 익숙한 곡조였다. 그래서 관객들이 “어, 내가 아는 소리다.” 하고 반응할 만한 포인트가 있었다. 보통 클래식 신곡은 처음 들으면 막연하기 마련인데, 이 곡은 직관적으로 ‘좋았다’는 인상이 남았다.
안성균은 창작곡이 진행되는 중반까지 무대 왼쪽 끝 신디사이저 앞에 앉아 박자와 흐름을 체크했다. 그러다 후반부에는 직접 장치를 통해 연주에 합류했다. 나는 자신의 곡이 초연되는 무대를 감상하는 작곡가의 옆모습을 길게 지켜볼 수 있었다. 표정은 마냥 설레 보이지도, 떨려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기색이 컸다.
그렇지만, 아마 그날을 가장 기다려온 사람일 테니 긴장감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곡이 끝난 뒤 관객과 잠시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올 줄 몰랐는데, 어디서 보신 거예요?” 하고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뒤쪽에 앉아 있던 친구와 서로를 가리키며 조용히 장난을 쳤다.
어두운 공연장 속, 홀로 번뜩이던 네모난 비상구 표시가 기억난다. 이런 공연이 가능했던 건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기꺼이 밖으로 내보였기 때문이겠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연주자는 중간 소통 시간에 “오늘 한 열 명 정도 올 줄 알았다.”고 했지만, 관객석은 거의 가득 찼고 초연곡임에도 공연 내내 집중도가 높았다.
최근 여러 클래식 공연을 접했지만, 살아 있는 현대 작곡가의 곡을 직접 감상할 기회는 드물었다. 현대음악을 즐겨 듣곤 했어도, 작곡가가 무대에 함께하는 장면은 흔치 않았다. 거기에 신디사이저라는 전자 악기까지 더해진 무대라니, ‘현대적’일 것임이 분명했고, 미래지향적인 음향과 낯선 사운드가 뒤섞인 실험적 무대를 보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전자 악기 특유의 차가운 질감은 분명 느껴졌지만, 그 속에 담긴 건 차갑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였다. 악장이 흐를수록, 나는 작곡가 안성균이라는 한 사람이 써 내려간 방대한 심해 일기장을 한 장씩 넘겨 보는 기분이었다.
결국 ‘한 사람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작곡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여정이었다.
이러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자신의 온 세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곳곳에 숨어 있지 않은가. 덕분에 이런 바다빛 조명 아래의 공연장도 방문해 보고, 귀여운 볼펜도 받았다. 나와 같이 무언가에 몰입한 이의 일기장도 몇 장 넘겨 보며 친구와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으니, 역시 이 세계는 이렇게 재미있다.
어쩌면 ‘몰입’이란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끝에서 스스로를 되물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자, 오늘은 무엇에 빠져볼까.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늘 그렇듯 좋아하는 것에 몰입해야지.
(프로코피예프 들으러 가는 중…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