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탑 메이킹 센스_메인 포스터.jpg

 

 

 

완벽한 체험을 위해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일부러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가히 심혈을 기울였다고 봐도 될 정도로 노력했다. 그러나 뇌를 잠시 어디다 던져두고 싶을 때마다 다음에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넘기고 보다 보면 삼십 분째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숏폼 콘텐츠 애청자인 나는 SNS를 유랑하다 하필 <스탑 메이킹 센스>의 짤막한 예고편과 소개를 봐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숏폼을 볼 때 언제나 그러하듯이 주의 깊게 보지도 않았고, 특별히 어떤 내용인지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고백하자면 상영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영화 제목도 제대로 외지 못했다. 스탑… 스탑 뭐시기였는데. 일단 들어가자).


오늘의 기분이 고스란히 기억에 퇴적되었다가 꿈속에서 흩뿌려지는 것처럼, 그 소개와 예고편을 본 날 나에겐 단순하지만 명료한 감정, 즐거움이 남았다. 아마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가 상영되는 날 저녁 시간을 비워두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런 철저한 무관심의 태도는 나 스스로가 정말 알고 싶은 게 아니라면 관심을 두지 않는 천성적인 게으름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아예 모르고 봐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어 일부러 꾸며낸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예술


 

내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예술이 있다면 어떤 설명이나 보충 없이도 납득가는 예술이다. 가끔은 아는 게 징그러울 때가 있다. 아는 게 아는 것 그 자체 말고 어떤 욕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여겨질 때 특히 그렇다. 지식은 현실의 해상도를 높여주지만, 위계를 만들고 무지를 조롱하기도 한다. 그 본인이 무지했을 적은 새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다. 어떤 예술은 그 스스로 장벽을 쌓고 특정 계급만이 즐길 수 있는 폐쇄적인 문화로 자리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지식적인 면보다 감각적인 면이 더 크며 감각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지식도 바로 설 수 있는 법이고.


감각이 가장 두드러지는 예술이 바로 음악이다. 이 음악을 누가 작곡했고 누가 작사했는지, 여기에 어떤 악기가 쓰였고 그 악기의 연주자는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라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 같은 건 몰라도 된다. 듣기만 하면 된다. 듣고 느끼는 바가 있으면 된다. 가장 감각의 소모가 적은, 그래서 본능과 가까운 예술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음악 영화, 정확히 말하자면 콘서트 영화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알아가지 않았다(라고 하면 좀 정당한 이유가 되려나).

 

 

 

현혹의 무대로 입장!


 

스틸 1.jpg

 

 

영화는 그냥 시작된다. 지금 누가 나오는데요, 이들은 누구입니다, 같은 소개 없이 시작된다. 무대가 있고, 배우 킬리언 머피 같은 말쑥하고 점잖아 보이는 얼굴의 남자가 나타난다(나는 그가 밴드 ‘토킹헤즈’의 리드보컬인 '데이비드 번'인 걸 몰랐다. 당연히 밴드 ‘토킹헤즈’도 몰랐다). 그는 카세트테이프를 옆에 두고 반주를 틀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남자는 정직한 톤으로 열창하는데, 그렇게 잘 부르다 하이라이트 끝부분에 갑자기 목소리가 쉰 사람처럼 소리를 일부러 흘린다. 이게 뭐지 싶다가도, 얼른 2절에서도 그 같은 반복을 듣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피어났다는 걸 나는 느꼈다.


보컬 목소리의 급격한 전복이 매력적인 이 노래의 제목은 ‘사이코 킬러’인데, 제목이 심각한 걸 알고 있는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노래의 박차를 타고 있다. 제목과 상반되는 이 분위기는 무얼 의도한 건가, 생각할 새 없이, 나의 머릿속은 이게 뭐지, 그런데 재밌어, 로 이어진다. 그런 현혹의 무대다.

 

 

 

망가짐의 시


 

다음 곡부턴, 남자 뒤로 몇몇 기구, 그리고 멤버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들어서며 밴드가 구성된다. 그들은 마치 우주선에 탑승한 선원들 같고, 이제 다 같이 이 우주선을 움직여 전진한다. 어디로? 그건 알 수 없지만, 나는 속수무책으로 이끌린다. 내 삶과는 다른 속도에 놓인 채. 그들이 나를 다른 곳에 데려다 줄 것만 같다. 나 혼자선 절대 갈 수 없는 어딘가에.

 

 

스틸 2.jpg

 

 

경쾌한 노래들, 신명 나는 노래들이 이어진다. 이 밴드 노래의 재밌는 점은 노래 중간중간에 노래의 깔끔한 혹은 정겨운 품질을 일부러 어그러뜨리는 듯한 리듬과 곡소리, 춤사위가 뒤섞인다는 점이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경쾌하고 시원하다. 그뿐만 아니라 가사도 뜬금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내뱉는다 하면 저 사람 왜 저래, 하는 소리를 들을 법한 가사들이다. 그러나 그 깨알같이 웃기고 어이없는 가사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한 테마로 이어졌다 사라지는 반주에 얹히면서, 마치 시처럼 심오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획득한다(특히 'Once In a Lifetime'이 그렇다). 그리고 리듬의 고유한 속도와 중력까지 느끼며 우리는 그들의 시를 받아들인다. 온몸으로.


그들의 시가 어떤 시냐고 하면, 망가지는 시이다. 반복되는 가사들과 잘게 쪼개고 부수고 합치는 리듬은 처음엔 어처구니없다가도 갑자기 또렷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듣다 보면 보이게 되는 것, 그게 그들이 추구하는 시의 방식이다.

 

 

 

망가짐의 예술로


 

스틸 4.jpg

 

 

그들에게 격식은 하찮은 것이다. 그들은 점점 더 과장된 행동을 한다. 기이한 체조를 선보이기도 하고, 개다리춤을 추기도 하고, 무대를 빙빙 돌기도 하고, 갑자기 엄청 큰 양복을 입고 나타나 로봇처럼 뚝딱거리기도 한다. 그들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은 이 무대에 특별한 규칙이 지배하고 있다는 걸 알린다. 여기는 모든 게 망가지고 비틀리는 우스꽝스러운 공간. 그들은 먼저 용감하게 망가지면서 그들을 보고 있는 우리 또한 망가져도 된다고 은연중에 알린다. 아니 알리는 게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따라 하게 만든다. 신명 나는 리듬을 자아내면서. 그들의 무대는 오로지 그것만을 집요하게 보여주고 끝이 난다.


세상은 망가짐을 손쉽게 허락하지 않지만, 예술은 아주 흔쾌히 허락한다. 세상이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걸 예술은 그 자신이 먼저 기꺼이 망가지면서 깨닫게 한다. 그렇게 세상이 엉망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망가지는가? 아니다. 가벼워진다. 자유로워진다. 더할 나위 없이. 어떤 부족함도 없이.


그래서 공연장, 아니 상영관을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니 그날 꿈속에서도 나는 토킹헤즈의 노래들을 떠올리며 자유, 희열을 느꼈다. 마치 펀치 머신 신기록을 달성한 사람처럼. 그 신기록은 달리 말하자면 이 콘서트 영화가 달성한 예술의 신기록이 아닐까?

 

 

 

에디터 안태준.jpg

 

 

안태준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쓰는 동안 나는 거기 있을 수 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