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깊고 잔잔한 서사의 흐름과 마침내 연결되는 요소들에서 감독의 치밀함을 느낄 수 있다. 보다 보면 저절로 ‘이렇게 끌고 왔구나’, ‘잊을 법도 한데 이거를 사용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의 영화는 주로 가족, 그중에서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를 꺼내온다. 영화 〈환상의 빛〉(1995) 라거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어느 가족〉(2018)에서도 볼 수 있듯 가족영화라는 틀 안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 이별과 새로운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미성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가족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족은 비혈연의 관계성을 가진다. 이번 영화에서도 아버지가 서로 다른 네 명의 아이들-혹은 학교에서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당하고 있는 사키까지 다섯 명-이 모여 그들만의 새로운 가족 관계성을 만든다.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걱정하고 도와주고 아픔을 함께 이겨낸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인 그들의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 그리고 편지와 가끔 보내는 생활비 너머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존재도 아이들과 가족이 될 수 없다. 영화는 두 명의 두 명의 남자를 등장시키지만, 그들은 유키의 친부모가 아니다. 끝까지 아이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결국 감독의 다른 가족영화와 다르게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진정한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혼자 떠나기 전 페스트푸드점에서 학교에 가고 싶다는 아키라를 앞에 두고 이 모든 것은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 탓이라거나“나는 왜 행복해지면 안 돼?”라며 투정을 부린다. 그녀는 어른이 아니다. 그리고 유키의 생일을 맞아 밤 중에 나가는 두 아이를 보면서 주인집 사람들은 귀엽게 생겼다고만 할 뿐,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 역시 어른이 아니다. 편의점에서 아폴로 쵸코를 살 때도 편의점 사장은 환하게 웃으면서 소풍 가서 신나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유키와 함께 묻을 간식을 사는 아이들의 비극성과 어른처럼 보이는 그들은 철저하게 대비된다. 아이들의 엄마로서 가장 비극적인 현실을 알고 있는 그녀도, 집세가 밀리고 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무어라 물어보지 않는 집주인도, 반년 동안 아키라를 보면서 저렇게 많은 간식을 사 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의점 사장까지. 그 대신 너무 이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아키라가 등장한다. 그리고 학교 폭력이라는 사회의 이면에서 고통받고 있으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사키의 주변에도 도움을 주는 어른은 등장하지 않는다. 네 명의 아이들과 비슷하게 그녀 주변에서 어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아이를 성적으로 이용하거나 등교하지 않고 가출했음에도 찾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더욱 의미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라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려져 있던 가족 형태인 그들을 좁고 어두운 틈에서 꺼내온 것처럼 이번에도 ‘틈’에 주목해 보려고 한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적인 카메라 기법과 의도적인 ‘보이지 않음’을 통해, 아동 방치라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사회와 어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존재성’과 그들의 최소한의 생존 몸짓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카메라
영화는 시작부터 앞으로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않을 것을 구분하여 말한다. ‘이 영화는 동경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임을 밝힙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사건은 실제이기에 관객이 영화 안에나 밖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아이들의 심리 상태나 생각은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 이때 영화가 보이지 않는 것을 사실적으로 포착해서 보여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영화는 일본에서 발생한 실화를 모티브로 비극적인 현실 속의 아이들을 중심인물로 내세운다. 1988년 일본의 나시 스가모 사남매 방임 사건을 소재로 하며 당시 일본 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면서 일본의 복지 체계, 방치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해당 사건은 영화와 비교했을 때 결말부에서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막내의 죽음과 땅에 묻는 것, 이를 방관한 사회와 어른들과 같은 큰 틀은 동일하다. 사실적인 카메라 사용과 잔잔한 분위기로 인해서 영화이면서 동시에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사계절의 흐름을 찍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일상을 영화적으로 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담는 것이 관건이었고 그는 스스로 영화에 특정한 교훈을 넣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보이지 않는 것을 직접 찾아내게 된다.
그러면서 “조명을 쓰지 않고 되도록 자연광을 살려서 슈퍼 16밀리 카메라로 촬영”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바다출판사, 2017, 203쪽
했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가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도록 과하게 무언가를 배치하거나 부각하지 않는다. 비전문 아역 배우들의 연기 아닌 연기는 그 당시 일본 사회가 느꼈을 아동 방치 문제의 심각성을 관객이 사실감 있게 느끼게끔 한다. 상황에 따른 현장음과 일상 장면, 그리고 다각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을 통해서 인물의 눈과 흘리는 땀, 떨리는 손 등에 주목하게 만든다.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고자 할 때, 화면은 인물의 신체를 클로즈업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영화에서도 카메라는 많이 흔들리며 마치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어른을 쳐다보는 것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집중해야 한다. 아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모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동격의 위치를 형성한다. 이는 무엇이 이분법적 구분으로 나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보여주지 않는 것은 영화의 제목처럼 아무도 모르게끔 잘려 나간다. 우선, 오프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될 때 이사하는 아키라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카메라는 아키라의 얼굴과 어머니의 얼굴 중 아키라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어머니는 과감하게 잘라낸다. 이는 어머니의 존재가 아이들 사이에서 점차 보이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영화가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도 있는 어머니의 이면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집중한다는 것을 시작부터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은 아이들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아키라가 학교에서 서성이다가 유키가 죽은 것을 뒤늦게 알아채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카메라는 각각 의자 위에서 까치발을 든 유키의 양발-카메라는 발목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과 마루에 누워 있는 유키의 한쪽 손, 그리고 시게루, 쿄코, 아키라 순으로 클로즈업된 얼굴을 보여준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관객은 상상하게 된다. 아이들이 느낄 슬픔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가라오케에서 노래하고 번 돈을 건네는 사키를 뒤로 하고 거리를 뛰어가는 아키라를 통해서 한 번 더 말한다. 아키라가 약 1분 동안 뛰는 롱 쇼트를 보면, 아키라의 달리기와 카메라의 속도가 맞지 않는 지점이 생긴다. 즉, 아키라가 사키를 뒤로한 채 달리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이때 카메라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가는 지속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아키라의 감정선과 내면을 비추는 메타포로 기능한다. 달려가는 소년은 어머니의 부재, 그리고 사키에게서도 멀어지고 싶다는 심리를 행동으로 드러낸다. 즉, 아키라는 그곳에서 사실 가수가 되고 있었다고 말하는 어머니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사키가 노래하고 돈을 벌어온 모습은 자신과 동생들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언젠가 또 떠나버릴 것만 같은 그녀에게서 지금 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달리는 모습은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세 명의 동생이 있는 집이다.

반면에, 보여주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모르는-혹은 모르는 척하-는 장면도 있다. 영화는 여러 번, 그리고 꽤 길게 몇 개의 롱 쇼트를 사용해서 동네의 길거리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밝은 대낮이나 어두운 밤에도 아키라는 그 거리를 돌아다닌다. 말끔한 사람들 사이에서 구멍 뚫린 옷과 덥수룩한 머리카락, 꾀죄죄한 얼굴을 한 아이들의 모습은 대비되어 눈에 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보고 지나치기만 한다. 우리는 ‘안’과 ‘못’의 차이를 안다. 그들은 못 본 것이 아니라 안 보는 것이다. 심지어 결말에서 아키라와 사키는 온몸에 흙을 묻힌 채로 모노레일에 앉아 있다. 이때 카메라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이동하며 위치는 두 아이를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높이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다다미 쇼트가 떠오른다. 즉, 영화의 오프닝과 달리 엔딩 크레딧에서는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라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듯하다. 결국 영화를 본 우리는 무언가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극명한 명암 대비를 통해서 문제를 책임져야 할 불특정 다수의 어른과 기울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피해받는 소수를 보여준다. ‘밝다’는 것은 밤이 지나고 환해지면서 새날이 온다는 의미가 있다. 아키라가 편의점 직원에게 편지에 글씨를 써달라고 할 때 자신의 이름에 ‘밝을 명’이라고 말한다. 날 일에, 달 월이 합쳐진 단어로 영화 전반에서 반복되는 눈부신 햇빛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아키라의 눈에는 밝은 빛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만 공허하게 남는 듯 보인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이들이 캐리어에서 나오는 순간 카메라에는 유독 햇빛이 여러 차례 반사된다. 인간의 눈은 신체적으로 해를 계속 쳐다볼 수는 없다. 20초, 그리고 30초를 보다 보면 눈물과 함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영화에서 해는 직접적으로 쳐다보려고 하는 아이들의 문제로 상징된다. 그렇게 영화 초반 캐리어에서 아이들이 나올 때 햇빛이 반사되는 장면은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만 동시에 세상의 빛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즉, 카메라에 반사되는 햇빛은 비참하고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 결국 현실을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에서 햇빛이 다시 등장한 순간은 집에 전기가 끊기고 아이들이 공원에 가서 씻게 되었을 때이다. 카메라는 물을 받는 아키라의 얼굴을 밑에서 하늘 방향으로 찍어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에는 밝아서 잘 보이지 않는 하늘과 찡그린 아키라의 얼굴을 한 번에 담고 하늘로 인해서 아키라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보이게 된다. 그리고 결말부에서 유키가 죽은 다음에 아키라가 동네를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햇빛은 그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카메라에 비춘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밝기를 과도하게 높인 듯 잘 보이지 않기까지 한다. 이때 아키라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 한가운데에서 빙빙 돌고만 있다.
강렬한 햇빛을 비추고 나서 영화는 인물의 얼굴이나 표정조차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을 선택한다. 처음으로 유키와 함께 가는 공항에서 아키라와 사키가 울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렇게 어두운 순간을 앞서 보여준 적이 있었다. 유키의 생일을 맞이해서 아키라와 유키가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가 쓸쓸하게 집으로 다시 걸어오는 장면이다. 이전에 시끄럽고 분주했던 도시의 거리가 아닌 2차선 도로에 사람도, 차도 없는 거리가 대비된다. 두 아이가 손을 맞잡고 걸어오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위치는 CCTV나 신호등 위치에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CCTV는 정부나 지자체와 같이 사회에서 관리하는 물건으로 방범이나 범죄를 방지하는 등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설치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감시하고 예방하는 지점은 없다. 그렇기에 적막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정면으로 찍혀도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햇빛은 아키라의 뒷모습과 비행기 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한다. 여전히 편의점에서 주는 폐기 음식을 받아서 함께 집으로 향하는 네 아이들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본다. 카메라는 그 순간을 포착하여 정지시킨다. 그렇게 관객은 아이들이 집에 잘 도착했을지, 더 나은 삶을 살아갈지 알 수 없다. 여전히 현실에서 아이들이 뒷모습으로만 비치며 그들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임을 강조한다. 다만, 성장한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밤이 지나고 환해진 새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과 작은 기적을 발견하게 된다. 시게루가 카메라를 향해 뒤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카메라의 틈에 숨겨진 인물의 표정과 대사, 행동뿐만 아니라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도 발화한다.
2. 캐리어와 대문, 신발, 그리고 심기.
어느 어두운 밤, 구멍이 뚫린 낡은 옷을 입은 아키라와 사키가 자기 몸만한 분홍색 캐리어를 품에 소중하게 안은 채 모노레일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감독이 제시한 의문투성이의 시작점은 곧장 영화에서 드러난다. 분주하게 이사를 끝마친 후, 아키라는 캐리어를 연다. 그리고 그 속에는 동생들이 있었다. 구겨진 채 멈춰 있는 아이들. 그 누구도 아이들이 캐리어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다. 그 아이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몰랐다. 알고자 하지 않으려고 했던 현실이다. 이내 관객은 ‘설마’하는 불안감을 느낀다. 설마, 첫 장면의 저 캐리어 안에 담겨 있던 것이 '누구'인지를. 영화 속 아키라와 세 명의 동생에게 ‘캐리어’는 하나의 놀이 도구이다. 시끄럽게 했을 때 혼나는 곳이나 떠들고 싶을 때 스스로 들어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가 인물들을 가장 밑바닥까지 보내는 순간, 캐리어는 놀이 도구로 사용되지 않는다. 웃음이 아닌 죽음을 담아낸 곳이다. 아이들에게 캐리어가 삶-즐겁게 웃는 시간-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게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보호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죽음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끝까지 이겨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으로 아이들이 이사를 할 때 캐리어 안에서 무엇을 떠올릴까. 잠시 뒤 꺼내질 자신이 아닌 영원히 갇혀있을 자신을 볼지도 모른다. 결국 캐리어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던 좁은 공간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란다. 키가 크고 생각이 바뀌고 성숙해진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캐리어 안에 구겨 넣어버리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캐리어는 현실과 영화에서 아이들의 존재를 축소하고 격리하는 공간으로 상징된다. 어떻게 보면, 집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한 크리스마스가 지났음에도 오지 않은 어머니를 시작으로 아이들은 구겨지고 있었는지로 모른다. 구겨지는 순간에도 네 명의 아이들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여전히 엄마의 자리를 남겨두고 있다. 시게루가 박스가 아닌 의자에 앉을 법도 한데, 그 자리는 끝까지 남겨 놓는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다.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게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키라가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점차 나쁜 짓을 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부모화’가 아이에게 쉬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영화에서 집은 중요한 상징을 시사한다. 배경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풀 향이 난다던 집은 점차 쓰레기 냄새로 뒤덮인다. 그렇다면 집 밖에 위치한 대문은 어떨까. 빌라의 대문을 처음 봤을 때부터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옆을 막거나 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는 담장 없이 녹슬기 시작한 하늘색의 문틀이 입구다. 이 입구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동시에 누군가가 해당 대문을 통해 들어오거나 나가고 있으면 반대 사람은 이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옆으로 걸어 나간다. 즉, 이 집에는 안과 밖을 구분짓고 위험한 상황을 막아낼 대문이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문의 위치와 역할은 허울뿐인, 언뜻 보이게는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이는 영화에서 말하는 책임지지 않는 사회와 동격으로 둘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한 복지 체계라는 틀은 있지만, 정작 아이들에게는 복지 센터로 가면 모두가 흩어지게 된다는 불안감만을 조성한다. 반면, 사키의 집 대문은 유리문으로 둘러져 있어 올바른 대문의 역할이라고 보인다. 결국 아키라 집과 사키 집 대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담장의 유무이며, 더 나아가 부모님의 유무일 것이다. 하지만 대문이 있더라도 문제의 원인은 안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만, 사키라는 인물은 실화에 없이 창작된 인물이기에 정확하게 그녀가 학교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회 구조의 문제가 있다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아이들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감싸줄 어른이 없기에 아키라는 편의점 사장에게 물건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는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 중 그 무엇도 댈 수가 없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틀뿐인 대문과 곪은 문제가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막힌 대문으로 상징된다.
아이들을 챙겨줄 ‘진정한 어른’이 없다 보니까 아이들이 입는 옷과 신발은 딱 맞지 않는다. 아키라의 외투는 크고 유키의 신발은 작다. 유키는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붉은색 샌들로 밑창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 신발을 좋아한다.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신발은 부모들이 아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을 때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다. ‘뾱뾱’ 소리가 느리게 나면 잘 걷고 있는 것이고 빠르게 나면 어딘가로 뛰어가거나 사고치고 있다는 의미. 더 나아가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눈을 돌려 내 아이를 확인해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유키가 엄마를 지하철로 마중 나가는 날,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이라고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다섯 명의 아이는 모두 혼자서 위험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키라는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쿄코는 떠난 어머니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방어 기제로, 시게루와 유키는 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부모가 필요한 시기에 그들이 없음으로 인한 문제, 사키는 학교에서 따돌림으로 인한 스트레스이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아키라가 엄마가 보낸 세뱃돈인 것처럼 거짓으로 아이들에게 용돈을 나눠주고 무엇을 사고 싶은지 물어본다. 이때 아키라는 글로브를 사고 싶다고 했고 쿄코는 피아노, 시게루는 롤러 브레이드, 유키는 인형을 말한다. 이는 돌아오는 힘이 있는 관성과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놀이에 해당한다. 아키라와 쿄코를 보면, 야구는 보통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하기 마련이다. 이때 공은 누군가에게 던져지고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피아노 역시 건반을 누르면 음이 나오고 다시 원상태로 건반이 올라와서 원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롤러 브레이드와 인형은 무엇일까. 영화 전반에서 시게루는 혼자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인 카드 게임도 카드를 나열한 채 혼자서 양옆을 오가면서 1인 2역을 한다. 이는 인형 놀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의 차례가 있고 상대방의 차례가 지난 다음에 다시 내 차례가 돌아온다. 어떻게 본다면 순환의 섭리, 과정인 것이다.
영화에서 순환은 식물을 심는 것으로도 드러난다. 아이들은 공원에서 퍼온 흙과 씨앗을 모아 각자의 이름을 쓴 라면 용기에 심는다. 영화 내내 베란다에서 식물은 점차 자라고 가짓수가 늘어남을 볼 수 있다. 다 자란 식물은 새로운 씨앗을 만들고 다시 라면 화분에 심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는 공항에서 아키라와 사키가 흙을 파고 유키를 묻는 장면과 겹친다. 식물을 심고 유키를 심어내는 순간, 아키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식물을 심을 때에는 동생들과 함께 웃고 글자를 잘 모르는 유키를 대신해서 이름까지 써준다. 하지만 공항에서는 아무 말 없이,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지나가는 비행기 아래에서 동생을 묻는다. 이때 떨리는 아키라의 손 위로 사키의 손이 맞닿는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듯하다. 유키는 다시 자라나서 환하게 웃는 꽃을 피울 것이라고.
3. 아무도 모르는 틈의 이야기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것들이 있다. 선과 악, 어른과 아이 그리고 삶과 죽음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정확하게 나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인 ‘아무도 모른다’는 정말 어머니를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의 이야기를 가져오게 한다. 혹은 도둑질을 하려고 한 아이들을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 자체의 기준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는 공간과도 연결이 된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 자체를 하나의 캐리어라고 생각해 본다면, 캐리어 안에는 물건을 넣은 사람만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을 열기 전에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처럼 아이들이 살던 집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안에 뭐가 있었는지, 아이들의 삶이 어땠는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물론 집주인이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 물어보긴 한다. 하지만 결국 집주인은 아무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에 ‘모른다’라는 결과로 귀결된다.
또한, 영화의 결말에서 아이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거나 지금 있던 집에서 쫓겨나 복지 센터로 이동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서 생활할지도 알 수 없다.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졌을 때 병원으로 갔다면 살 수도 있었다. 물론 유키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기 때문에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은 아이들이 병원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동생이 다쳤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결국 아키라와 쿄코, 시게루와 유키는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알지 못한다.
특히, 영화에서 다섯 명은 아이들은 우는 법을 모른다. 다섯 명 중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 쿄코와 시게루는 유키가 죽어가는 순간을 봤다. 그럼에도 아키라가 집에 와서 물을 때 의자에서 떨어졌다고만 말할 뿐이다. 세 아이는 누워있는 유키를 보면서 넋이 나간 얼굴이다. 아키라도 손을 떨거나 한숨을 쉴 뿐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의 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날 때 눈에서 눈물을 한 방울 흘리긴 하지만, 이것은 슬퍼서 울 때 나오는 눈물인지 아침에 하품을 하면서 나오는 눈물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결국 아이들이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은 아이들의 성장을 모른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아키라는 변성기가 왔다. 유키 역시 캐리어에 들어갈 때 모르는 사이에 키가 컸음을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동시에 유키가 묻힌 곳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이 된다. 결국 영화는 아무도 모르는 틈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맞잡은 손을 조용히 포착한다. 어른도, 구조도, 말도 없이, 그저 손을 잡는 일로 서로를 확인하는 아이들은 연대라기보다, 사라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인 것이다. 누구도 이들을 지켜보지 않고, 누구도 이 손을 잡아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손은 서로를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이 손은 구조를 바라거나 도움을 청하는 제스처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자신들을 구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려는 절박한 몸짓이다. 캐리어 안에 구겨진 존재들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이 손은, 영화의 질문이자 답이다.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끝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 작은 손에 담긴 고통과 성장의 새싹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맞잡은 손’은 아이들의 숨겨진 고통과 동시에 연약하지만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