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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면 주로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한 기사와 마법사, 용과 성의 이야기들을 많이 읽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배명훈의 『기병과 마법사』가 표방하는 "바로 여기가 원본인 판타지"라는 선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는 한국 판타지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그에 대한 하나의 확신에 찬 답변이다.

 

이 소설이 한국형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은 서양 판타지의 핵심 인물인 ‘기사(knight)’를 우리 문화권의 ‘기병’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단순한 번역의 차원을 넘어서는데, 한반도 지역의 기병에 관한 역사학과 군사학 분야의 논문 수십 편을 섭렵하며, 다르나킨이라는 인물이 딛고 설 사회문화적 배경을 정교하게 구축해냈다. 마목인과 초원의 존재, 온돌의 신비함 등은 이런 중앙유라시아 연구의 결실이다.

 

서구 판타지에서 기사가 봉건제도와 기독교 문명을 배경으로 한다면, 이 소설의 기병은 한반도 북부 너머의 대륙과 전근대 동아시아 문명을 토대로 한다. 기병 다르나킨은 단순히 기사의 한국적 변주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문명적 맥락에서 탄생한 독창적 인물이다. “다르나킨은 이제 다시는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는 고백에서 드러나듯, 그는 개인적 영광보다는 연대와 동행을 추구하는 새로운 영웅상을 제시한다.

 

388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미스터리와 액션, 성장서사를 절묘하게 직조해낸다. ‘1021’이라는 의미심장한 숫자와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인공물 거문담을 둘러싼 비밀은 독자를 끝까지 몰입시킨다. 특히 거문담이라는 명명은 ‘거문고’의 음향과 ‘담(墻)’의 침묵 사이에서 탄생한 절묘한 언어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한편, ‘1021’이라는 숫자도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이 숫자는 반복되는 재앙의 주기, 잊힌 전승, 그리고 단절된 기억을 품고 있다. 이를 “시간의 독”이라고 부른다. 윤해는 예언자이기 이전에, 그 끊긴 시간을 회복하고 미래를 다시 잇기 위한 연결자다. 『기병과 마법사』는 단지 세계를 구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되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해는 기병 다르나킨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하고, 소라울의 은난조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다른 시대의 예언자들과 시공간을 초월한 연대를 형성한다. “먼저 그 애를 일깨워”라는 마로하의 조언에서 “‘예언자’라는 말보다 ‘너도’라는 말이 더 깊이 새겨졌다”는 대목은, 이 소설의 핵심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세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거문담의 신비, 1021이라는 숫자의 주기성, 파멸의 신전이라는 거대한 위협은 모두 세계 자체가 가진 동력이다.

 

『기병과 마법사』는 한국 판타지 문학이 서구 판타지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한자 문화권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도, 충분한 자료 조사와 개념적 구상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세계를 구축해냈다. 기병과 마법사들이 벌이는 모험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우리가 속한 문화적 맥락에서 가능한 환상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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