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이라고 했을 때 처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싹한 형상의 귀신보다는 흰 천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할로윈 분장이다. 그렇지만 그 할로윈 분장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기에, 유령은 형상을 직접 보기보다 상상으로 인해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령'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겁이 났다. 무서운 극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괜히 그런 연출이 있는 건 아닐까, 분장이 무섭지는 않을까.
그래서 포스터에 드러난 화려한 조명의 분장실 거울, 그리고 검은 실루엣을 봤을 땐 호기심이 일었다. 유령이라는 말에서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건 또 예상 밖이었다. “사람으로 났다면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처럼 죽어야 한다”는 키 메시지가 어떻게 저 이미지 속에서 구현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극의 주인공 '배명순'은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린다. 도망을 가려 했으나 붙잡히기도 하고, 아이들이 눈에 밟혀 스스로 돌아오기도 하며 쳇바퀴 같은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그러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게 되지만, 남편이 쫓아올까 두려워 이름도 '정순임'으로 바꾸고 주민등록증도 없이 찜질방, 식당을 전전하며 살아가게 된다.
상당히 비극적인 내용이지만, 사실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서사임은 분명하다. 공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단순히 불행을 전시하고 신파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면 진부해지기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유령'은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극중극'의 형식으로 이를 극복하고, 서사를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한다.
극중극은 분장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가 분장 도구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 오며 무대로 직접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배명순' 역의 배우를 살갑게 '언니'라고 부르며 등장한 이 배우의 손을 거쳐 맨얼굴의 '배명순'은 시퍼런 멍투성이 얼굴이 된다.
연극을 보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모른 척 하게 되는 것이 분장의 존재다. 분장을 통해 극 중 배우는 다양한 상황을 얼굴과 옷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을 분장으로 인식할 때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감은 떨어진다. 그렇기에 분장 트레이를 대놓고 등장시킨 것은 이 극이 전통적인 몰입 방식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상처를 분장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배명순'이 겪은 폭력의 비극성을 전시하는 효과는 줄어들지만, 극이 전체적으로 의도하는 '역할'에 대한 논의는 심화된다. 극에서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배명순'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도 모두 하나의 '역할'이라는 것이고, '역할'을 맡은 배우의 존재도 끊임없이 드러난다. 상대 배우가 던지듯이 남긴 말에 대해 그거 대본에 있는 것 맞냐고 무대 위에서 직접 이야기하는 식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신분을 숨기며 일하는 '배명순'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악역으로 재등장한 '남편' 역의 배우가 역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 극대화된다. 배우와 연출진과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코믹하게 연출되는 이 부분은 이 극의 전환점이자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이 연극 못 하겠다며 연출을 데려오라고 고함치는 배우들을 보다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웃음이 터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며 창작진이 의도한 '배우'와 '역할'에 대한 메시지는 더욱 또렷해진다. "이 대본을 보고 출연을 결정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 대사 넣지 말자고 하지 않았느냐", "내 역할이 이런데 우리 애들이 이 연극을 어떻게 보러 오겠느냐"와 같은 대사에 실컷 웃기는 했는데, 그러다 보니 눈앞에 있는 배우들이 온전히 그 역할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그렇다고 실제 배우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해, 이 연극에서 '이지하 배우'가 연기하는 '배명순 역'을 보고 있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린다.
그렇게 관객들은 극 초반부터 언급되었던, 모든 사람은 삶 속에서 일종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더욱 실감하게 되고, 그 '역할'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실재하는 '존재'를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극의 도입부에 무대에 등장한 이지하 배우는 "나는 배씨(배명순, 본명)였다가, 정씨(정순임, 가명)였다가, 다시 배씨"라고 말한다. 배명순과 정순임 모두 그의 역할이자 그의 실재를 증명하는 존재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이 없고,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정순임이자 배명순은 실재함에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그래서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여기서 '유령'의 또 다른 사전적 의미를 돌이켜 본다. '이름뿐이고 실제는 없는 것', 이것이 배명순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유령'이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하지만 배명순이라는 이름도, 정순임이라는 이름도 그가 살아온 역할임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유령이어서는 안 됐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었어야 했다. 극에서는 이렇게 유령처럼 세상에서 잊히고 지워진 존재들이 사람이었음을 관객들에게 외치고 있다.
포스터에 적힌 문구 "I'm nowhere"는 "I'm no where(나는 어디에도 없다)"와 "I'm now here(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로 동시에 읽힌다. 어디에도 없었던(no where) 유령들은 사실 항상 이곳에(now here)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속 의식과 함께 무연고자들의 시신이 화장되는 마지막 신에서, 나는 동음이의어로서의 '화장'을 떠올렸다.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과 분장실 거울 앞에서 분장(화장)하는 장면이 눈앞에서 겹쳐졌다. 유령 같았던 존재가 무속 의식을 통해 최소한의 위로를 받는 것도 화장이며,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기 위해 필수적인 것도 화장이다. 나는 어떤 화장을 하며 살아가고 있고, 어떤 화장으로 떠나갈 것인가. 그리고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화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가볍지만은 않은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섰다.
많은 사람이 이 극을 통해 사람은 무엇이고, 삶은 사람에게 또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유령과 같은 지워진 존재들이 있었음을 느끼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극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친절하지는 않아서 조금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극 중에서 배우도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마냥 무게만 잡는 것도 절대로 아니어서, 코믹한 신과 임팩트 있는 신의 완급 조절도 적절해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본 연극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6월 22일까지 공연된다. 얼마 남지 않은 공연 기간, 더 많은 이들이 연극을 감상하고, 사람에 대해 사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