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3학년 박종철은 하숙집 앞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불법 연행됐다. 향년 22세,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세상을 떠났다. 대공분실 총책임자였던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은 가혹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사인을 쇼크사라고 거짓 발표했다. 하지만 진실은 곧 세상에 드러났다. 1월 19일, 박종철의 실제 사인이 알려지며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2025년 6월 10일,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6월 민주항쟁 38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했다. 故 김수근이 1976년 건축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종철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자가 공포를 견디던 미궁이었다. 대한민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은 독재 정권 시절 국가사업을 상당수 도맡으며 건축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독재 정권의 이념, 독재자의 사고방식을 대공분실이란 공간으로 정교하게 구현한 미궁의 설계자였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남영동>은 김수근의 역작이자 민주주의의 무덤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공연된 관객 이동형 장소 특정 연극이다. 일반적인 무대극에선 관객은 객석에 존재하고, 무대에서만 시간과 장소가 변한다. 하지만 <미궁의 설계자@남영동>은 무대, 즉 대공분실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고 관객과 시간이 무대를 따라 움직이는 특별한 작품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관 개관 기념으로 공연된 연극 <미궁의 설계자@남영동>은 2025년 5월 27일에 개막해 6월 1일에 막을 내렸다. 윤미숙 역은 전국향, 허일규 역은 손성호, 양신호 역은 이종무, 송경수 역은 송현섭, 권나은 역은 이가을, 서대리 역은 최지환, 구대리 역은 유지훈, 윤대리 역은 송지나, 김대리 역은 박재민이 연기했다. 관객의 이동과 진행을 돕는 배우들 또한 ‘응시자’로 존재했다. 응시자 역엔 김진영, 신동일, 황경욱, 한채원이 출연했다.
<미궁의 설계자>는 공연예술창작산실 대본 공모 최우수작 수상(2021)·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 부문 선정(2022)·월간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7 수상(2023)·제45회 서울연극제 우수 작품상, 연출상, 우수 연기상, 신인연기상 수상(2024)·제18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2024)했다. 극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공연되며 또다시 큰 화제를 모았다. 작품은 2025년 12월 5일부터 6일까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기념관 로비에서 사전 안내가 끝나면, 30명의 관객은 응시자들의 지시를 따라 야외 민주광장으로 이동한다. 그곳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 테니스코트, 즉 고문을 하는 수사관들이 체력 단련을 위해 운동하는 공간이었다. 첫 장면에선 세 시간과 공간이 교차한다. 1975년 건축가 ‘김’ 설계사무소, 1986년 명동, 2025년 민주화운동기념관.
1975년, 김 대신 일을 도맡은 설계사무소 실무자 양신호는 정부 2인자 허일규에게 공간 설계를 의뢰받는다. 간첩들을 고문할 건물을 설계해 달란 의뢰, 즉 국가의 명령이다. 1986년, 명동에서 여자 친구 윤정을 기다리던 23세 대학생 경수는 불법 검거돼 대공분실에 끌려간다. 2025년, 다큐멘터리 작가 나은은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해설사 미숙을 만난다.
2025년, 중년의 해설사 미숙은 나은에게 검은 벽돌로 지어진 대공분실의 건축 의도를 설명한다. 핵심은 5층이다. 사람 머리조차 못 들어갈 작은 5층 창문은, 피해자들이 탈출 및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뛰어내리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비좁게 설계됐다. 검은 철문 또한 마찬가지다. ‘국제해양연구소’란 위장 상호로 운영된 대공분실은 밖에선 목적을 몰라야 했다. 따라서 연행자 전용 출입문은 역방향으로 설계됐다. 철문이 열릴 때, 탱크가 지나가는 것처럼 기괴하게 퍼지는 금속음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군부대에 끌려왔다고 착각하게 했다.
관객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계단을 오르며 2층 직원실, 3층 특수조사실, 4층 예비실까지 이동한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 양신호는 고뇌하고, 권력을 두려워하다 완전히 굴복하며 자기합리화를 한다. 1975년의 양신호가 그려내고 만드는 설계도와 모형은 1986년엔 미궁이자 지옥이, 2025년엔 피와 고통으로 쓰인 역사가 된다.
4층 예비실. 유신이란 거대 권력과 공포에 먹혀버린 양신호는 그리스 신화 속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든 ‘다이달로스’ 이야기를 꺼낸다. 그 또한 자신처럼 명령을 받고 ‘미노스’ 왕의 정적을 제거할 미궁을 어쩔 수 없이 설계했다는 양신호. 사무소 직원들 또한 자기합리화에 눈이 먼 건 마찬가지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이는 패기 넘치는 젊은 여직원 한 명뿐이다.
처음엔 소심하게나마 반항하고, 완성된 모형도 부수려 했던 양신호가 권력에 굴복해 열변을 토하는 동안, 1986년의 경수는 고문받아 피폐해진 채 대공분실을 헤맨다. 이곳을 나갈 수 없다며 중얼대는 경수는 유령처럼 관객들 앞을 떠돈다. 관객이 앉은 의자 앞을 지나는 경수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지만, 2025년의 관객은 그를 구하지 못한다. 2025년의 나은과 미숙은 살인자가 쓸 칼을 만든 기술자에 대해 말한다. 미숙은 살인자가 칼을 쓸 걸 알았더라면 칼끝을 무디게라도 만들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양신호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5층 조사실, 긴 복도를 사이에 둔 어긋난 철문들. 여러 개의 철문 안엔 붉은 방, 즉 고문실이 있다. 방과 방끼리 마주 보지 못하게 엇갈리게 배치된 구조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설계였다. 맞은편 방의 사람과는 절대로 마주칠 수 없는 것이다. 공간의 잔인함과 공포심은 극대화되고, 영겁에 갇힌 것처럼 시간은 무한하게 존재하는 치밀하게 악랄한 구조다.
1987년, 故 박종철 열사가 22세에 유명을 달리한 방도 5층에 있었다. 긴 복도에 일렬로 서는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509호를 볼 수밖에 없다. 3평 남짓한 509호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방이다. 관객은 그가 견딘 공포와 고립감의 일부라도 잠시나마 함께 겪어야 한다. 응시자들은 관객들을 5~6명씩 나눠 고문실로 안내한다. 비좁은 방엔 책상과 의자, 또한 녹음기가 있다. 응시자가 녹음기 재생 버튼을 누르면,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으로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던 故 김근태의 증언을 바탕으로 녹음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공연을 위해 제작했거나, 혹은 유사한 공간이 아닌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고문을 받았던 5층에선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1970~1980년대를 살며 독재 정권을 피부로 겪어봤든, 그 이후에 태어나 지나간 이야기로만 접했든 처절한 고통의 기억이 자리한 공간에선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공간은 그렇게 관객을, 나약한 인간을 압도하며 모든 이들을 그 시간으로 끌고 들어갔다.
다시 1층, 검은 벽돌 건물 앞. 관객들은 건축가 김, 즉 김수근에게 공간을 의뢰한 자(당시 내무부 장관 김치열)의 이름이 새겨진 초석을 본다. 또한 경수의 유해가 대공분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본다. 고문을 받으며 하늘을 나는 상상을 했던, 여자 친구 윤정을 기다리던 평범하고 순진했던 대학생 경수는 죽어서야 대공분실에서 해방된다.
2025년, 나은은 공간을 해설하며 힘들어하던 미숙에게 1986년 경수의 여자 친구 윤정이었냐 묻는다. 미숙은 1975년, 건축가 김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대공분실 설계에 반기를 들었던 젊은 여직원이었다. 죄책감과 부채 의식이 그녀를 지금까지 남영동에 머물게 한 것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관 정식 개관 전, 한 회당 약 30명으로 제한된 공연을 관람, 혹은 체험할 수 있는 건 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대공분실 검은 벽돌 건물의 많은 부분이 공연을 위해 개방되며 대다수의 장면은 실내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초반 몇 장면들과 엔딩 무대는 야외였기에 날씨도 좋아야 했다.
오후 5시 공연이었기에 해는 아직 얼굴을 감추기 전이었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다. 하늘엔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기념관 바로 앞 남영역에선 지하철이 들어오는 안내 방송 소리도 들려왔다. 20대부터 60~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은 한순간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며 역사의 목격자가 됐다.
즉 모든 조건이 완벽했지만,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피로 쓴 역사가 칼날처럼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해사하게 웃는 경수를 보며 부끄럽게 살아남았단 게 실감 났으며, 권력 앞에 무력했던 자신을 속죄하는 미숙은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합리화란 괴물에 잡아먹히다 변절하는 양신호는 더없이 씁쓸했다. 양신호의 모델인 김수근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수근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한 또 다른 건축가는,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김중업이다. 그는 1970년대 독재 정권의 시책을 비판하다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설계도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2층 직원실에서 휴먼스케일(Human scale : 인간의 몸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정한 공간 또는 척도, 건축학 용어)에 대해 설명하던 양신호는 4층 예비실에선 설계도는 무감각할 뿐이라 말한다. 모든 건축은 인간을 위한 건축이고, 인간이 척도이며, 인간이 바로미터가 돼야 한다고 휴먼스케일과 휴머니즘을 강조하던 양신호. 그 마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권력이란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대공분실 건물의 검은 벽돌처럼 점점 검게 변한다. 눈이 가려져 방향감각을 잃고 권력의 꼭대기로 끌려간 건, 나선형 계단을 오르던 수용자들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초반 양신호에겐 새하얀 양심이 남아 있었고, 정부 2인자 허일규 또한 죄책감이란 게 있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하늘에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타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 시대엔 다른 선택을 한 이도 분명히 존재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단 말은 지옥을 설계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상흔이자 국가 폭력의 증거로 남은 남영동 대공분실. 타협과 굴복, 외면이란 재료로 만들어진 검은 벽돌 건물은 이렇게 묻는 듯했다. 예술은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