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은 단순한 걷기와는 다른 일이다. 산책에는 언제나 목적이, 아주 사소한 것부터 꽤나 깊은 것까지의 다채로운 목적이 존재하며, 어떠한 공간과 그곳에 할당하는 시간이 있다. 목적과 공간과 시간. 이것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이거나, 혹은 삶 그 자체이다. 따라서 산책을 한다는 것은 잠시 동안 삶의 모양을 그려보는 일이다. 이것은 시가 하는 일과 정확히 같다.
안태운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읽는다.
그제 밤에는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잠들었습니다. 빈방의 빛이라니, 나는 몇 년 전 밤에도 그것에 대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생활을 하면 빈방은 잃어버리고 어느새 사라지고 문득 그런 게 있었다니. 여전히 묘연했지만 왠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 빛에 대해서 써야 할 것이라는 강박이 들었지.
- <빈방의 빛> 부분
지난밤을 사로잡았던 생각이 아침이 밝아도 여전할 때, 그것은 하나의 강박이 되어 우리의 하루를 움직인다.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는 생각이 그런 경우.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방에 빛이 들어오는 “드넓은 오후”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테다. 그렇게 빛을 기다리며 잠들고 깨길 반복하는 사이 빛과 함께 방에 들어온 것은 “여행 계획을 세우는 여행자들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시인은 지도를 펼친다. 그냥 빛이 아니고 반드시 ‘빈방’의 빛이어야 한다. 따라서 빈방의 빛을 보려면 방을 먼저 비워야 한다는 것. 그러니 그날 오후는 멀리서 방으로 밀려오는 빛을 위해 방을 비우는 산책의 형식으로 결정된다. 목적을 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걷는다면 우린 이 시간을 삶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나는 평상에 누워서 다 환하다고 말하고 싶었나. 다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었나. 다 기쁘다고 다 슬프다고 말하고 싶었나. 나는 빈방의 빛 속에 있었고, 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밟으면 흙먼지만 날리는 곳에서 모두가 다 부르기 쉬운 노래를 하고 있는 곳에서 다 떨고 있는 곳에서 다 쉬고 있는 곳에서 빈방의 빛, 날개처럼 순간 모습을 감추기도 하는 곳에서 다 흔들리는 곳에서 나는 있었고, 스며드는 빛, 가늘게 뜬 눈으로, 나는 그 방을 보여주고 싶었지.
오후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시인은 강박적으로 찾아다녔던 (혹은 이미 “둘러싸여 있었”던) 그 빛에 대해 생각한다. “생활”로 가득 찼던 방을 잠시 비우고 나왔을 때 “모두가 다 부르기 쉬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그러니까 비슷한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던 것은 삶의 진실을 말해주는 환하고 밝은 빛이었나. 아니면 너무 밝아서 오히려 모든 것을 숨기는 거짓이었나. 기쁨인지 슬픔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이 단순해진 우리의 ‘생활’은 공허해서 그것은 텅 빈 방과 닮아있다.
너무 밝게 빛나는 삶의 진실은 각자 “가늘게 뜬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빈방의 빛, 의미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삶. 각자가 그것을 목격할 자리를 우리에게 남겨둔 채 시인은 방에서 멀어져 다시 걷기로 한다. 그러나 이내 발견하는 것은 벌써 여백 없이 가득 채워지고 만 삶들이다.
공터를 잃었네. 있었는데. 옆 사람과 흰 개와 함께 공터 밖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공터를 잃었고 옆 사람은 회상하고 있다.
- <공터를 통해> 부분
인생이 빡빡하다는 비유는 그저 비유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이 부여한 모든 종류의 의미와 의무로 가득 채워진다. 우리는 빈 공간에 스스로 삶을 채울 여유를 차마 누리지 못한 채 점차 “공터를 잃”고, 부여된 목적만이 빽빽한 시공간인 “공터 밖을 산책” ‘당’한다. 그 수동형 산책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과거의 공터”, 공터였던 것, 혹은 “공터를 처음 잃었던 지점”뿐이다. 우리가 사라진 공터를 회상하면서 느끼는 정서는 아마도 “상심”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가득 채울 때도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다. 우리의 시대는 지금 채움이 씁쓸해지는 지점에 서있다는 것. 빈 곳을 찾아서 산책하는 시인의 진단이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위해서 무언가가 필요한, 끝없이 높아지는 필요를 채우는 데 급급한 시대에 우리는 도착해있다. 예컨대 우산이 필요하다며 우산을 사러 가면서 “비가 그칠까 봐 조마조마”(<산책했죠>)해지는 그런 삶이다. 이런 시대에서도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그러니까 다른 목적을 찾으려는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걷는 것이 시인일 테다. 이 길고 어려운 산책 끝에 도달하길 바라는 시공간을 시인은 순수한 마음으로 써내려간다.
미래는 수영장
미래는 수영장이라며
몸을 풀어 헤치는 한 사람
물이 생기자 헤엄칠 수 있게 되는 두 사람
차례차례 다 수영장이 된다면
헤엄친다면
넓어진다면
세 사람이 수영장이 되어 다 풀어지고 있다면
미래는 수영장
그 사람마다 나였으면
네 사람이
다섯 사람이
만나는 사람마다 넓어지는 수영장이라면
- <미래는 수영장> 부분
우리의 미래는 수영장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의 미래는 단단한 고체로 높이 쌓아올리는 빌딩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풀어서 흐르고 넓어지는 액체의 시공간이어야 한다. 나를 풀어 헤친 곳에서 누군가 헤엄치고, 또 그 누군가가 다시 자신을 풀어 헤쳐 넓어지는 무한의 장소. 서로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면서 함께 “둥둥 떠 있는 것들”이, 그래도 “안녕?”하고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장벽이 없는 액체형 공터다. 그곳은 아마 사라졌던 ‘공터’에서 기원됐을, 채워진 동시에 비워진 상태로 존재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장소다. 시종 단단하고 사뭇 비장한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동심처럼 살아있는 낙원이 있기를 바라면서, 시인은 산책하고 또 유영한다. 시를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