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서늘한 소문의 근원지다. 자정이 되면 책 읽는 여인의 석상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울음소리가 복도를 채우고, 망령들이 이리저리 날뛴다. 덕분에 어두워진 학교는 그 자체로 공포감을 유발하고,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오싹해지게 만든다. 어쩌다 학교는 공포와 연을 맺게 된 걸까?
학교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1998년에 개봉한 <여고괴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죽란 여자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살인 사건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보면 귀신이나 피에서 오는 공포보다는 학생들이 지닌 분노와 슬픔에 더 눈이 가고 그 감정이 오히려 큰 공포로 다가온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마냥 허구적인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고괴담>에 나타나는 두려움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부하는 기계로서의 학생
<여고괴담>의 주된 공간은 3학년 3반 교실이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나와 늦은 밤까지 좁은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교실에서 수험공부를 한다. 그녀들의 책상 위에는 무채색의 글자들과 도표로 빼곡한 교과서와 문제집, 공책이 두툼하게 쌓여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자세로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버겁지만, 학생들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건 그들이 교내에서 단지 ‘공부하는 기계’로 취급받는다는 점이다.
3학년 3반의 담임이었던 박기숙(이용녀 분)의 시체가 학교 난간에서 발견되며 영화는 본격적인 서사의 시작을 알린다. 교실은 교사의 죽음으로 어수선해지고, 그 틈에 소위 ‘미친 개’라 불리는 오광구(박용수 분)가 새로운 담임으로 부임한다. 첫 날부터 오광구는 “너희들의 1년은 내 앞으로 완전히 차압당했다”고 선언함으로서 학생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성적순으로 차별하고 물리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한창 다양한 꿈을 품어야 할 시기, 학생들은 미래를 상상할 기회도 빼앗긴 채 오직 성적 올리기만을 강요당하면서 무력감을 느낀다.
학업 경쟁이 만연한 공간에서 학생들이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게 가능할까. 이들은 서로를 친구라고 여기기보다 경쟁자로 생각하게 된다. 반에서 각각 1등과 2등을 맡고 있는 소영(박진희 분)과 정숙(윤지혜 분)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둘은 원래 절친한 친구였으나 교사들의 비교로 인해 서먹해지고 한때의 우정을 저버리고 만다. 정숙은 소영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학업에만 매진하고, 정숙의 곁에는 또래 친구 한 명 남게 되지 않는다. 공부를 잘 해야 하는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사정은 성적이 우수한 소영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이루고 싶은 절박한 꿈이란 없다. 그저 서울대에 진학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뿐이다.
시험 성적이 나온 날, 또 다시 2등을 하게 된 정숙은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또 다시 담임에게 소영과 비교를 당하고 극한의 스트레스로 인해 교과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그 후 소영과 심한 말다툼까지 해버린 정숙은 안타깝게도 늦은 밤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처럼 영화는 과열된 학업 경쟁 속에서 학생들의 자아와 감정이 모두 삭제당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학창시절이란 단어에서 갖는 산뜻하고 풋풋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추억 만들기도 사치에 불과하다. 기계는 추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라는 권위적인 그림자
잘 알려진 반전이지만 학교를 둘러싼 불가사의한 살인 사건을 벌인 인물은 재이(최강희 분)다. 그저 유약한 학생으로만 비춰졌던 그녀는 실은 장진주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교사 은영(이미연 분)과 이 학교를 다녔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9년 전 학교에서 안타깝게 사망하게 되었고, 억울함을 풀지 못한 그녀의 혼령이 이름만 바꾼 채 긴 시간동안 학교를 배회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사망하게 된 책임에는 앞서 시체로 발견된 교사 박기숙에게 많은 지분이 있다.
과거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로 재이는 담임 박기숙에게 온갖 멸시를 받는다. “어떻게 너만 거치면 이렇게 재수가 없”냐며 대놓고 조롱하는 것은 물론, 깨끗하지 못한 교복을 트집 잡으며 따끔한 체벌도 일삼는다. 무시는 무시를 낳는 경향이 있다. 박기숙의 차별로 인해 재이는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친하게 지냈던 은영도 겁을 먹고 재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결국 재이는 미술실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재이의 죽음은 동급생들이 벌인 짓이지만, 시초에는 교사가 있다. 따라서 특정 직업을 천대하고 얕은 생각으로만 학생들을 바라봤던 교사가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박기숙 외에도 성적으로만 학생들을 평가했던 오광구는 또 다른 분노를 유발하는 인물이다. 그는 미술에 소질이 있지만, 기괴한 그림을 그리고 학업에 관심 없다는 이유로 지오(김규리 분)를 아니꼬와 한다. 교실에서 지오와 소영이 분신사바를 했던 날, 오광구는 지오에게 칠판 지우개를 던지고는 출석부로 머리까지 때린다. 정작 지오에게 분신사바를 부탁했던 우등생 소영은 체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물론 소영도 자유롭지 못하다. 오광구는 대놓고 소영에게 불쾌한 추행을 일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소영은 교사인 오광구를 거스를 수 없다. 매를 맞아도, 추행을 당해도, 언어폭력을 당해도 별 수 없다. 학생들에게는 힘이 없기에.
공포를 해방시키는 힘
어려운 상황일수록 똘똘 뭉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영화 내에서는 학업 경쟁이나 따돌림으로 멀어진 관계도 비추지만, 반대로 묵묵히 서로의 곁에 있어주는 애정 깃든 관계도 조명하고 있다. 냉기가 감도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오와 재이가 붙어 있는 장면에서 발견된다.
지오는 혼자 교문에 서 있던 재이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해주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불량 학생에게 잡힌 재이를 구해주기도 한다. 재이 역시 지오에게 호감을 표한다. 어른들에게 무시 받던 지오의 그림을 보고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이 훌륭한 화가가 된”다며 따스한 격려를 해주고, 자신이 체득한 미술 지식을 지오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렇게 지오와 재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먼지 쌓인 미술실에서 둘만의 우정을 소소하게 쌓아간다.
이 우정은 영화의 말미에 결정적인 힘을 보탠다. 귀신이었던 재이는 박기숙과 오광구를 살해한 뒤, 한때 친구였던 은영마저 위협한다. 그때 분노가 고조되어 이성을 잃은 재이 앞에 지오가 등장한다. 그녀는 재이에게 친구로서 진심 어린 충고를 하며, 살인을 멈춰달라고 울며 부탁한다. “제발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돌아가 줘, 재이야.” 옆에 있던 은영도 과거의 친구에게 온 마음을 담아 사과한다. 그저 손을 건네줄 친구가 필요했던 재이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친구 지오를 통해 그간의 앙금을 버리고, 길었던 학교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학교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시간 낭비라며 우정을 터부시했지만 결국 우정만이 재이가 지녀왔던 한을 풀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고괴담> 속에는 90년대 학교가 지닌 폭력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폭력성이 공포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반드시 입시에 성공해야만 한다는 압박, 그 성공을 위해서라면 옆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잔인함, 공부를 제외한 모든 일을 헛짓거리로 치부하는 안일함. 이 모든 것은 개성과 인간성이 지워진 학생들의 분노와 슬픔을 부풀리는 데 일조한다.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귀신도, 피도 아니다. 제각기 가진 특별한 고유성과 사고를 훼손시키는 입과 손. 꿈꿀 기회를 잃은 이름들. 묻혀버린 감정들. 그리고 현실도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