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치마 동지
내가 있던 학원은 작은 정육점과 나란히 붙어 있었다. 가게 사장님은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을 지니신 아주머니였다. 출근하자마자 나는 늘 정신이 없었고 그 분과 대화 나눌 겨를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오며 가며 인사만 열심히 나눈 사이였다. 그러던 중 나는 여사장님과 나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바로 앞치마. 둘 다 앞치마를 입은 상태로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카키색 캔버스 앞치마를 한 나는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빨간색 나일론 앞치마를 두른 사장님이 괜히 친근하게 다가왔다. 착장으로 인한 일차원적인 동질감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 동질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애’로 발전했는데 거기에도 공통점이 있다. 뛰어다니기. 우리는 길에서 바쁘게 뛰어다닐 때 그렇게 잘 마주쳤다. 사장님은 급하게 떨어진 비품을 사느라 슈퍼로 달려가실 때가 많았고 나는 유치원 차량에서 내리는 우리 원생을 픽업하느라 뛸 때가 많았다. 앞치마를 휘날리며 마주치는 일이 하루에 두세 번은 됐었다. 정신없는 얼굴을 하고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눴다. ‘아이고, 수고가 많으세요’하는 뉘앙스의 미소와 함께.
떠올려 보니 전우애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무언의 진한 동료애를 느끼면서도 아주머니와 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각자 앞치마를 두르고, 바쁘게 움직이고, 잠깐씩 서로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껍데기만 화려한 관계 속에서 앞치마 동지인 우리가 무해하고 순하게 빛나 보였다.
2. 나의 빵빵한 퇴근메이트
일하던 곳에 라디오가 있었다. 취미반 오전 수업 때 라디오를 잔잔하게 틀곤 했었는데 그건 내게 일종의 백색소음과 같은 개념이었다. 수업이 한창일 때는 라디오를 끄고 일에 집중하다가 마지막 시간대의 아이들이 빠져나가면 마음 편히 라디오 볼륨을 키웠다. 두 손으로 찌뿌둥한 허리를 짚고 좌우로 몸을 흔들흔들 비틀면서 한차례 폭풍이 쓸고 지나간 현장을 관망하듯이 스캔했다. 널브러진 색연필과 크레파스, 물감 범벅이 된 팔레트, 자잘하게 조각난 색지들, 책상에 비처럼 쏟아져 내린 지우개똥을 바라보며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시동을 걸다 오후 6시를 환영해야 하니까.
“웅, 탁! 웅, 탁탁탁!” 하고 내려찍는 아주 경쾌한 비트가 조용한 공간을 꽉 채우고 배캠(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오프닝곡 ‘Satisfaction’ 도입부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면 빗자루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모든 에너지가 다 바닥난 것 같으면서도 고개는 까딱거리기 바빴다. 그루브 있게 걷는 비둘기처럼 슬렁슬렁 교실을 누볐다. 박자를 타면 뭔가 덜 힘든 기분이다. 대걸레질도, 어질러진 물건 정리도, 책상 닦기도 관대하게 맞이할 수 있다.
종일 사람을 상대하느라 기가 빨렸던 나는 그제서야 여유란 것이 생긴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꿈틀대는 그 비트를 듣고 있으면 몸속으로 깊숙이 박카스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서히 몸에 에너지가 차오르다가 오프닝 멘트가 시작되면 숨구멍까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출발합니다!”라는 디스크자키의 목소리는 정말....사르르 녹는다. 나의 오후 6시는 오직 그 목소리, 그 음악이어야 했다.
청소가 길어지면 그냥 이른 퇴근을 포기했다. 어차피 일터와 집이 꽤 멀었어서 아예 마음 편하게 오프닝도 듣고 짧으면 한 곡, 길면 세 곡까지 듣고 집에 갔다. 흐물거리는 몸에 연료를 그득 채웠던 시간. 고단하면 고단할수록 효과가 좋았다. 걸을 때마다 삼선슬리퍼가 척척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운을 쏟은 날에는 부스터라도 단 것 마냥 피곤 가득한 걸음에 힘을 실어 줬다.
물론 학원에서 배캠을 다 듣고 가면 너무 늦어지기에(집에는 가야지) 두 시간을 다 들은 적은 없었다. 그래도 클로징 멘트는 잘 알고 있다. “디스크자키 배철수입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닙니다. 피로를 풀어 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하며 감사해했다.
이 피로회복제 같은 곡은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니 1965년 롤링스톤즈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라는 곡을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가 좀 더 클래시컬한 락 버전으로 연주한 커버곡이었다. 롤링스톤즈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배캠에만 한정돼 있던 내적 친분은 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그 사람들은 날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들을 안다. 생각할수록 묘했다. 나의 퇴근메이트가 배철수 선생님과 롤링스톤즈라니!
혼자하는 짝사랑이면 어떻고 홀로 쌓는 내적 친분이면 어떠한가. 물리적으로도 멀고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지만 그들은 언제나 마음 안에 살았다. 제일 지친 시간대에 나타나 완벽할 만큼 기운을 북돋아 준 사람들. 그들은 퇴근길에도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먼 곳에서 뻗어 나와 내게 닿은 그 기운을 잘 간직해서 집까지 가는 데 유용하게 썼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소중한 그 연결감이 혹여나 시간 앞에 훅 꺼질까 봐 불씨처럼 지켜 내는 중이다. 따로 또 같이 하던 나의 빵빵한 퇴근메이트들. 그 존재감이 마음 한구석 허기지지 않게, 그늘지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투명하고 다정하게 나를 보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