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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청춘에 대한 비유는 그 양상만큼이나 다양하다. 먼저 단어 뜻 그대로 봄에 비유되곤 한다. 한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생동감 있는,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공유된 의식이 낳은 비유이다. 그러나 금방 폈다 떨어지는 꽃과 함께 덧없는 계절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또 무섭게 타오르지만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으로, 격정적인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폭풍우로 빗대는 경우도 있다. 이 비유들에는 청춘을 둘러싼 양가적 특성을 대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멀리서 관조하면 그 자체로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지만,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이는 응당한 혼란과 고통에 시달림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무섭도록 차가운 얼음은 어떨까. 작은 각얼음이 아닌, 광활히 펼쳐진 얼음 대지라면? 청춘에 해당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투명하게 반짝인다는 점에서 아름답지만, 깨지거나 녹는 속성 때문에 청춘의 위태로움을 대변하기에도 안성맞춤인 비유이다. 그렇다면 이 얼음을 깨뜨리는, 마침내 녹기 쉽고 유약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주체는 누구일까. 그저 시간이라는 공평한 도끼가 청춘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얼음 판을 숭덩숭덩 잘라, 너희는 그저 녹아 사라질 운명이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일까.

 

안소니 첸 감독의 세 청춘을 담은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는 조금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 '브레이킹 아이스(breaking ice)'라는 제목은 얼음을 깨는 능동적인, 또 진행형의 행위를 나타낸다. 즉, 얼음을 깨부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 같다. 고집스레 얼어 있던 덩어리를 조금씩 깨부수는 과정에서, 버거울 때면 누군가의 힘을 빌리며 그 지난한 작업을 계속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청춘의 의미와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청춘이라 믿었던, 믿어야만 했던 것들을 제 손으로 조금씩 깨부시고 재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완전한, 아니, 온전한 조각이 되리라는 믿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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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의 로그라인을 소개한다.

 

["주저하는 사이 어른이 되어 버린 세 사람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들이 부딪히며 시작되는 꿈 같은 변화를 그린 청춘 케미스트리"]

 

작품은 중국 대련 지방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조화롭게 섞인 지역인 만큼, 독특한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여행 가이드 일을 하고 있는 나나, 이모의 한식당 일을 돕고 있는 샤오, 그리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련을 방문한 하오펑 셋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은 끝에 상하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하오펑은 오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언제나 적당한 곳에서 적당히 뛰어내려 삶을 마무리하는 상상을 한다. 나나는 어릴 적부터 유망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만둔 채 생업을 위한 일에만 종사하고 있다. 샤오 역시 마땅한 지향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다 어디에라도 정착하기 위해 대련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곳을 집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로그라인이 보여주듯, 이들 모두 '주저하는' 청춘들이다. 항상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경계 지대에 끼어 있는, 회색 인간들이다.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또 세상을 믿고 무언가 결정하거나 도전하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거리의 간판에는 중국어와 한국어가 혼용되어 있고, 사람들은 독특한 억양의 말을 사용하고, 조금은 다른 빛깔의 한복이 휘날리는 대련과 묘하게 맞닿은 지점이 있다.

 

이야기는 잔잔한 분위기에서 선형적으로 흘러간다. 우연히 나나가 가이드 하는 여행에 참여한 하오펑은 휴대폰을 분실한 것을 계기로 나나에 눈에 밟히게 된다. 그날 밤, 하오펑은 나나의 소개로 샤오를 만나게 되고 셋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함께 대련을 여행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다. 피로를 애써 숨긴 얼굴, 눈물로 얼룩진 얼굴, 영문 모르지만 일단 억지로라도 웃음을 터트려보는, 그 안쓰러운 얼굴에서 어쩐지 익숙함을 본다.

 

감독은 '낮은 온도에서는 얼지만, 수면 위에 올려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녹아드는 얼음'의 속성을 세 사람의 관계에 빗대어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여기서 '낮은 온도'는 청춘들을 둘러싼 환경일 것이다. 그들이 그들 자신으로 있지 못하게 하는 환경(하오펑의 경우), 그들이 마음껏 꿈꾸지 못하게 하는 환경(나나의 경우), 그들에게 마음껏 방황을 허락하지 않는 환경(샤오의 경우)는 자유로이 흘러보기도 전에 꽁꽁 얼어붙게 하는 '낮은 온도' 그 자체이다. 감독은 이를 구체화 해 청춘들이 이전 세대의 정부, 사회에 대한 실망으로 집단적 우울증의 상태를 겪어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은 오늘 날의 청춘들은 흐르기 보다는 고여있다 얼어버리는 얼음들로, 서로 섞이지 못한 채 데굴데굴 굴러 그 모서리로 누군가를 상처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대련 곳곳을 돌아다니는 세 사람의 미소를 보여주며 그들이 어쨌든 '녹아들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녹는 계기는 대단치 않다. 술과 춤에 몸을 맡기고, 작은 기타 선율에 의지해 노래하고, 작은 컵라면 하나에 몸을 녹이고, 서점에서 '제일 두꺼운 책 훔치기' 같은 유치한 내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나와 너의 경계를 녹이고 우리가 될 수 있다. 특히 나나와 하오펑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밤에 서로의 몸 구석구석을 헤집는 것으로 상대에게 녹아들고자 한다. 청춘은, 그들은 언제고 서로에게 부드럽게 녹아들어 하나가, 함께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감독이 말하는 청춘의 정열이란 얼어붙기 보다는 녹아 어지럽게 섞이고, 또 흘러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서로의 존재를 통해 제 손으로 자신의 '아이스'를 '브레이킹' 할 용기를 얻는다. 나나는 오래 먼지에 쌓여 있던 스케이트 화를 꺼내 보고, 샤오는 자신의 의지로 대련을 떠나 자유로운 여행을 시작하고, 하오펑은 나나를 향한 사랑을 통해 삶의 지지대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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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 셋은 함께 백두산에 가게 된다. 하오펑은 서점에서 발견한 책을 통해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단군신화를 접한다. 그에 마음이 사로잡힌 하오펑의 길을, 나나와 샤오는 군말 없이 함께 떠나준다. 셋은 어느 새 이유 없이 함께가 자연스러운 사이가 된 것이다.

 

천지를 보러 떠난 여행이었지만, 거의 도달한 지점에서 눈보라가 심해진 탓에 셋은 하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결국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내려가야만 했던 때, 하오펑은 그제야 자신의 삶을 끝낼 '적당한 곳'을 찾은 듯, 절벽에서 떨어지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셋은 곰과 조우하게 된다. 나나는 도망치기는커녕, 모든 것을 내어주듯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그러나 곰은 나나의 냄새를 맡고 조약돌처럼 까만 눈을 빛낼 뿐, 그저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단군신화 속에서 생명을 잉태했던 곰과 그를 껴안은 백두산은, 즉 자연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고 너무도 쉽게 제 생을 내어주는 청춘들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존재일지 모른다. 태초부터 서로에게 녹아들어 살아가는 자연 요소들은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의미없음으로 우리에게 빛나는 의미를 선물해준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마치 섬세히 스케치한 한 폭의 회화 같다. 대련의 아름다운 겨울 풍경과 위태로운 세 청춘을 맞부딪히면서도 삶의 풍경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운 점도 적지는 않았다. 아주 매력적인 공간 및 인물 설정이 끝으로 갈 수록 힘을 잃고, 그 의미가 퇴색되는 점이 아쉬웠다. 또한 수없이 재생산 되어 온 청춘물의 설정과 이미지를 별 가공없이 그대로 답습한 점 역시,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를 지나고 있는 나를 끝까지 설득하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찬사처럼, 이 영화는 국적과 상황을 불문하고 미래를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언제나 새롭게 녹아들 가능성이 있음을, 개개인의 존재가 그 가능성 자체임을, 강요없는 부드러운 연출로 깨닫게 한다.

 

6월 개봉을 확정한 안소니 첸 감독의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놓치지 말고 관람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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