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게서 온 편지: 수취인 불명>은 두 소년이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의 지난 전쟁 역사를 돌아보고 전쟁 사회에서 나타나는 남성상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메뚜기는 자신보다 더 남자답고 강인한 모습을 지닌 ACE라는 친구를 늘 동경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관객에게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 실제 전쟁 상황인지, 보이스카우트 소속인 그들의 단순 전쟁 놀이에 불과한 상황인 건지 설명하지 않는다. 잠시 부대에서 이탈한 메뚜기와 ACE는 그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벙커의 자물쇠를 몰래 열어 안으로 숨어든다. 몰래 잠입한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모습이 투영된 가상의 한 소년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관객은 불친절한 드라마 속에서 배우의 행동을 유추하며 찬찬히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낯설게 감각하기, 작품의 독특한 구조적 형식
이 작품은 뚜렷한 드라마 서사가 존재하거나 개연성이 잘 정돈된 연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 장면이나 대사가 파편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가끔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한, 다소 엉뚱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보며 우리는 공연을 관람하는 도중에도 그들의 대화가 현실인지 아니면 꿈과 같은 환상인지 쉽게 분간하기 어렵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하는 동작은 대체적으로 강렬하고 때로는 마음을 졸이며 보게끔 만든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내뿜는 에너지는 전쟁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와의 대비인 동시에 적절한 균형감을 만들어낸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팝 그룹 비틀즈의 음악은 배우가 직접 부는 하모니카를 통해 독특한 음색으로 다시 연주된다. 무대 위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도 어딘가 익숙하다.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쟁을 낯설게 감각함으로써 관객은 묘한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답습되는 남성성은 시대 폭력의 대물림일까?
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속 두 소년은 사회에서 은연중에 생성된 유해한 남성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한다. 마약사범들이 득실대는 마을에서 어린이가 제대로 된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정서적•신체적 학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아이들은 온갖 구조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부대에 새로 들어온 대원이 상급자들의 모진 핍박에 매일 밤 울었다는 소문, 결국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잔인한 현실은 직접적으로 무대 위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비극을 어젯밤 뉴스에서 봤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무심결에 흘려보냈을 그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
공연 진행 내내 활달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두 플레이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대원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움직임을 잠시 멈춘다. 사회 비판적인 내용도 풍자로 유쾌하게 풀어내던 두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군대 사회 문제, 나아가 미국의 지배층이 내재하고 있는 잔인한 폭력성을 엿볼 수 있다. 극 초반부 메뚜기가 ACE의 남자다움을 동경하는 것으로 묘사되나 사실 ‘남자답다’라는 개념은 허상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여러 허상의 집합체이다. 하지만 그 추상적이면서도 모호한 허상이 모여 끔찍한 사회 구조를 초래한다.
메뚜기와 ACE가 직면하고 있는 전쟁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허상으로 인식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전쟁도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이들의 무차별적인 희생을 낳고 이를 토대로 빚어진 개념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는 먼 곳의 이야기라며 그저 팔짱 낀 채 관망하는 이들이 여전히 넘쳐나기 때문이다.
미국 국기에 대한 선서문은 작품 안에서 배우들을 통해 여러 번 변주되어 나타난다. 인물들의 입을 빌려 우스꽝스럽게 바뀐 선서문은 강렬한 풍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야기 속 소년(혹은 현실 속 실제 두 사람)의 아버지가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얼굴에 빗대어 나타났다는 장면은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처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 두 소년은 오늘도 하늘을 향해 외친다. 자신들의 바람이 끝내 가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