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크기변환]포.jpg

 

 

아이였던 나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을 그저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였다. 낯선 동물이 말을 하고 익숙한 일상이 뒤틀리는 장면들은 마치 꿈처럼 기묘하고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다시 그의 그림을 마주한 나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예전에는 놓쳤던 장면 속 디테일, 배경에 숨겨진 의미, 인물의 표정에 담긴 감정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이번 「앤서니 브라운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그림책 전시가 아니라 한 작가의 내면과 예술 세계를 통째로 경험하는 특별한 여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그의 그림 속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나는 그 이야기를 스스로 해석하고 그 안에서 내 감정을 읽어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전시는 과거와 현재의 내가 조용히 이어지는 지점이자 잊고 지냈던 상상력과 감수성을 다시 깨우는 시간이 되었다.

 


[크기변환]3.jpg

The Three Wishes 2022 © Anthony Browne

 

 

 

시선의 전환, 의미의 발견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다. 단순히 가족 구성원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가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 형제를 향한 동경, 부모의 따뜻한 감정 같은 관계의 결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은 단순한 선과 색을 넘어 인간 관계와 사회적 메시지를 품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들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깊은 공감과 울림을 전달한다.

 

브라운의 작품은 일상의 평범한 풍경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 숨은 상상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을 두 번, 세 번 곱씹게 만든다.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감각이 서서히 밀려온다. 소파에 앉은 가족의 얼굴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든지, 집 안의 벽지가 정글로 이어진다든지, 아이가 들고 있는 책 속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등의 디테일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그림을 바라보게 된다.

 

전시장 한쪽에 전시된 작품 『돼지책』을 보았을 때가 그랬다. 그림 속 인물들은 점점 돼지처럼 변하고 있었고 그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그림을 보면서 ‘왜 인물들이 돼지가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 나는 어린 시절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에 작가가 던진 질문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 들었다. 그 그림 앞에서 나는 나의 가족을 떠올렸고 어릴 적 어머니가 집안일을 도맡으며 힘들어했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자 단순한 그림 한 장이 내 기억과 연결되며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그림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정적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보는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자극하고 각자의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만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그 이야기는 때때로 웃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 한편을 조용히 건드리는 감정으로 남기도 한다.

 

 

[크기변환]4.jpg

Willy_s Pictures 2000 © Anthony Browne

 

 

 

창작자의 진심, 예술로 드러나다

 

전시에서 특히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앤서니 브라운이 한때 창작의 슬럼프를 겪었고 『꿈꾸는 윌리』를 통해 다시 그림책의 기쁨과 작업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다는 일화였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무기력과 혼란의 시기를 예술로 극복하고 다시 자신을 표현하는 길로 돌아온 그의 경험은 단순한 작가의 이야기를 넘어 한 인간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했다.


작가로서 느낀 감정과 개인적인 경험을 솔직하게 작품에 녹여내는 그의 모습은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어떤 순간에 열정을 잃을 수 있겠지만 그럴 때 다시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크기변환]11.jpg

 

 

 

전시, 그리고 상상력의 회복

 

이번 전시는 단순한 원화 감상을 넘어 관람객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 속 공간을 체험하며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이 인상 깊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그림책 장면을 따라 걷고,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체험 부스는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전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시 구성은 앤서니 브라운이 일관되게 전해 온 ‘모든 세대를 위한 예술’이라는 메시지를 공간 전체에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었으며 세대를 아우르는 감동과 상상력을 함께 전했다.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 나 역시 나의 유년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가족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그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그때의 감정들이 현재의 나와 겹쳐지며 단순한 감상이 아닌 진한 감동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그의 그림책이 단지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의 감정과 이야기들을 담아낸 예술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가 나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은 어느새 잊고 지냈던 상상하고 느끼는 힘을 다시 꺼내보게 해준 순간들이었다.

 

 

 

컬쳐리스트.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