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다정한 동물들
신화 속 잊힌 존재들에게 말을 걸다
손창은(Zoe)의 개인전 <조용한 괴물들展>이 파주 헤이리마을 ‘갤러리 그안’(월~수 휴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멸종된 동물, 신화와 환상 속 동물 등을 회화, 패브릭 조각,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조용한 괴물들’이라는 전시 제목에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라진 존재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천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손창은은 SI그림책 학교를 졸업 후 소재로 쓸 신화 속 동물을 찾던 중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동물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국의 오래된 기록서 『산해경』을 만났다. 중국 각지의 산과 바다를 비롯해 그곳의 수많은 동식물을 기록한 이 책에 큰 영향을 받은 작가는 이후 신화 속 동물들을 자신만의 디자인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번 전시도 그 작업의 연장으로, 작가는 오래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동물들을 한데 모았다. 우리에게 입에서 입으로 ‘괴물’이라 전해져 온 동물들이 어쩌면 그저 평범한 동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오히려 이들이 인간에 의해 멸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전시가 꾸려졌다.
신 타위_캔버스위부조_1000x800
<조용한 괴물들展>은 크게 ‘휴매니멀’, ‘신화 속 상상동물들’, ‘몽룡’ 세 개의 프로젝트로 구성되어 있다.
‘휴매니멀’은 인간(Human)과 동물(Animal)의 합성어로 옛이야기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반인반수, 반인반신 등의 동물을 포함한다.
캐나다 개인전의 제목이기도 했던 휴매니멀은 당시 갤러리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그때는 페인팅으로만 표현했던 휴매니멀을 이번 전시에서는 사람의 얼굴은 클레이, 동물의 몸통은 패브릭으로 표현했다.
신화 속 상상동물: 폐폐(2020년작_중국고서 산해경 기록을 참고)
‘신화 속 상상동물들’은 신화와 설화 등에 등장하는 동물을 패브릭을 사용해 작업한 프로젝트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동물들은 작가와 관람객의 상상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용, 기린, 주, 만만, 폐폐 등 『산해경』을 비롯해 다양한 옛이야기 속에서 묘사되는 이 생명들은 낯설지만 다정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관람객을 만난다.
‘몽룡’은 ‘신화 속 상상동물들’의 일종의 스핀오프 프로젝트다. 해당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동물 중 한국에 특히 잘 알려진 용, 해태, 기린, 불가살이, 구미호 5종의 신화 속 동물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엮어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림책 등으로 작업했다. 캐릭터 개발과 애니메이션 제작 등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를 염두에 두고 계획된 프로젝트는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소녀 노아와 구미호 미우'_몽룡 스핀오프 '숨바꼭질'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일부
실제로 2024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신규캐릭터 IP제작지원’, ‘독립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의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캐릭터IP 시제품 샘플과 메뉴얼북, 7분 단편 애니메이션 등이 제작되었다. 또한 2025년 베트남 다낭 국제 영화제의 한국관 ‘K-Short Animation’에 초청되어 6월 29일부터 7월5일까지 4개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옴니버스로 편집되어 상영될 예정이다.
신화 속 잊힌 존재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침묵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느끼는 <조용한 괴물들展>은 5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전시를 앞두고 손창은 작가에게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Q.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Zoe’라는 필명을 쓰며 신화 속 동물들을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SI그림책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책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섬유조형(Fabric Sculptures)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더 깊이 있는 작업을 위해 캐나다에서 공부했습니다. 캐나다의 거대한 자연과 더불어 작업을 하던 중 팬데믹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죠. 지금은 작업을 이어가며 조이아트웍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지금까지 제가 쌓아왔던 작업물을 콘텐츠 제작이나 캐릭터 개발 등 상업적인 방식으로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신화 속 상상동물을 꾸준히 작업 소재로 삼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자연과 동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림책 소재를 고민하다가 문득 용이 떠올랐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데 누구도 실체를 본 적 없다는 부분이 흥미로웠죠. 그걸 계기로 신화 속 동물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며 관련된 작업을 해 왔습니다. 특히 『산해경』에 큰 영향을 받았고요.
사진이나 영상매체가 없던 시절 불쑥 마주친 낯선 생명체에 대해 묘사할 방법이 인간의 눈과 귀, 말과 글밖에 없었으므로 거기에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감정이 수반되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러면서 그 동물들이 때론 괴물로, 인간을 잡아먹는 맹수로 둔갑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인지 저도 이러한 기록 속 동물들을 저만의 디자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Q. 이번 ‘휴매니멀’ 프로젝트에서는 예전과 다르게 점토를 사용했는데, 이유가 궁금해요.
지금까지 작업을 돌아보며 천(Fabric)과 자수(Stitch)만으로는 표현의 한계를 느꼈어요. 특히 표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던 중 점토가 떠올랐죠. 제게는 낯선 재료인데 점토를 활용하니 표정을 훨씬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멸종 혹은 죽음이라는 어두운 테마를 섬세하게 표현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재료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더욱 풍부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제된 죽음_캔버스위부조_1000x800
Q. 전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상상 속 동물을 소개해 주세요.
포스터 속 두 동물을 소개해 드릴게요. 양의 뿔과 인간의 얼굴, 호랑이의 몸을 한 동물은 『산해경』에 등장한 ‘타위’라는 동물이에요. 기록에 따르면 저수와 장수의 깊은 곳에서 노니는데, 물속을 드나들 때면 매번 광채를 발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동물은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인어예요. 『산해경』에는 ‘제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데, 저는 그걸 참고했어요. 작품 제목은 ‘박제된 죽음’으로, 신비로운 동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해 봤습니다.
Q. ‘몽룡’ 프로젝트는 캐릭터 개발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셨는데, 좀 더 설명해 주세요.
다섯 동물에게 각각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용은 ‘몽룡’, 기린은 ‘피마이’, 불가살이는 ‘마구’, 구미호는 ‘미우’, 해태는 ‘우앙’이에요. 저의 디자인 아이디어가 들어가 흔히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도 다른 모습이고요. 현재 한국의 캐릭터 비지니스의 방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캐릭터지만, 앞으로 개성을 살려 캐릭터 산업에서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전시를 보러 오는 관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와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눈도 귀도 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고요함을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이 이번 전시의 ‘조용한 괴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들이 하는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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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은 작가는 이번 전시 이후로도 바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두 번의 개인전이 계획되어 있고, 캐릭터라이선싱페어와 광주에이스페어도 참가한다. ‘몽룡’은 캐릭터 상품으로, ‘휴매니멀’은 파인아트로 더 발전시킬 계획도 세우고 있다. 낯설지만 다정하고 조용한 괴물들이 사람들에게 친근한 괴물들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덧붙이는 그의 말처럼, 작가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이 섬세한 생명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