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크기변환]photo_2025-05-05_22-45-00.jpg

 

 

 

우리는 모두 가족 전문가다


 

우리는 모두 좋든 싫든 가족에 대한 전문가다. 우리는 가족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는 방식을 통해 전문가가 된다. 가족이 있어서, 가족이 없어서, 가족과 행복해서, 가족과 불행해서,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가족을 알게 된다. 가족이 공동의 상상과 각자의 현실에서 나름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이 사실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사회학이라는 분과를 창시한 콩트가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분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 개인은 사회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은 재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고, 가족만이 재생산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최소의 개체 단위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가족이다. 혼자인지, 여럿인지, 피가 섞였는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나중 문제이다. 가족의 방식으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 침몰 가족이 있다. 1990년대 후반 도쿄, 22세의 싱글맘 가노 호코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모집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고, 누구와라도 같이 키우는 것만이 그녀의 삶을 지탱할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침몰가족에 참여한 보육자는 2~30명가량. 대가 없이 많은 이들이 모여 가노 쓰치를 키웠다. 20년 후, 성인이 된 쓰치는 침몰가족을 시작한 어머니, 보육에 참여했던 어른들, 주말에 만났던 친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2019년 개봉한 <침몰가족>은 가노 쓰치 감독의 내한을 기념하여 4월 말과 5월 초 인디스페이스에서 재상영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크기변환]가노 쓰치.jpeg

 

 

20명이 동시에 아이를 공동 양육하면, 이들은 모두 가족이 되는 것일까. 보육에 참여했던 이들과 가노 쓰치는 공통적으로 서로가 가족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특히 어린 쓰치는 엄마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오직 엄마만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보육했던 이들이 친구나 지인으로 남을 수만도 없는 것도 가족이 전혀 아닐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20대의 청년이 된 쓰치를 만난 보육자들은 하나같이 쓰치에게 존댓말을 쓴다. 쓰치가 말을 낮추라고 하지만, 그들은 거부한다. ‘쓰치야’라고 부를 수 있던 쓰치는 아무래도 한없이 돌봐주어야 했던‘역사 속의 쓰치’이니까. 어른이 된 가노 쓰치는 더 이상 ‘역사 속의 쓰치’가 아니니까. 보육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쓰치가 남의 애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돌볼 수 있었다고, 혹은 자기 애를 키워보니 또 같은 마음이 있더라고 말한다.

 

 

[크기변환]photo_2025-05-05_22-44-37.jpg

 

 

한편, 침몰가족의 대척점에는 가노 쓰치의 친아버지가 있다. 가노 쓰치 감독은 어린 시절 주말이면 친부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지만, 그를 아빠 혹은 가족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호칭도 아버지 혹은 아빠가 아닌 이름인 야마 군으로 호명한다. 가노 쓰치 감독에게 엄마는 유일한 가족이라면, 아빠는 좀 친한 아저씨였던 셈이다. 그의 고향을 찾아 가진 술자리에서 야마 군은 침몰가족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내비친다. 자기는 가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하지만 엄마는 지독히도 싫어했다고. 침몰가족에는 모르는 인간들이 가득했고, 가노 호코는 주최자로서 침몰가족의 일원이었지만 본인은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거기에 도저히 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어린이집과 소학교의 소풍과 운동회 같은 곳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 야마 군은 쿨한 척, 그런 건 침몰가족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호통쳤지만, 그 호통에서 나는 야마 군이 침몰가족의 존재로 자신이 있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불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아버지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는 점에서는, 아버지로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함을 느끼기도 했다. 동시에 사진작가인 그의 필름에 가득한 가노 호코와 가노 쓰치의 사진(가노 호코는 지독히도 웃지 않은)에는 그가 바란 어떤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불만에 가노 쓰치는 이제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내가 아마 어른이 되었나 본다고 자막을 단다.

 

 

 

어쩌다 태어난 우리는



1311.jpg


 

90년대 일본의 한 정치인은 이혼이 늘고 가족 간 유대가 희미해지는 세태를 한탄하며 이대로 가다가 일본이 침몰한다고 말했다. 싱글맘 가노 호코는 그 말에서 침몰을 따와 침몰가족 모집 전단을 만든다. 애는 있고, 남편과 결혼은 없다. 그리고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알지도 못할 패거리가 둘러앉아 애를 키운다. 고매한 정치인께서 말씀하신 침몰에 이보다 더 부합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보편성에서 벗어난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해당 삶의 기이함이 아닌 우리가 보편적이라 여기는 대상의 기이함이다.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살아온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무언가를 고발하고 싶어서 사는 사람은 없다. 누가 사회운동 하겠다고 애를 낳아 모르는 사람들이랑 기르나. 우리는 거대한 합의 위에 집을 짓고 산다. 합의가 합의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땅이다. 우리는 매일 걸어도 땅을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언론은 90년대 싱글맘의‘도발적 시도’에 관심을 쏟는다. 누가 봐도 눈길을 끌지 않는가. 내 삶만 아니면, 그건 진기명기 서커스는 가십거리로 충분히 역할을 다하는 거다.

 

 

131.jpg


 

그래서 그 재미있는 가십거리 인생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는 거냐. 나는 이 영화를 가노 쓰치 감독이 만들어서 좋았다. ‘당사자니까 제일 잘 알 거 아니냐’ 따위의 말이 아니다. 쓰치 감독이 침몰가족을 만든 자신의 엄마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은 쓰치 감독만이 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 질문이 영화를 관통했기에 좋았다. 정상적이지 않은 집에서 아이를 키워서 상처가 될까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 침몰가족을 보며 누구는 가족주의의 대안으로 칭송하고, 누구는 사람의 삶을 밥반찬으로 써먹을 때 ‘역사 속의 쓰치’는 무럭무럭 자랐다. 사람들은 우리가 정상 가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가, 아무래도 가정환경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한다.


쓰치 감독의 엄마 가노 호코는 아이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 생각했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정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친절한 호코의 태도, 일종의 기개는 영화를 내내 압도하는 힘이었다. 호코는 명확하게 말한다. 사진 학교에서 만난 가노 쓰치의 친부는 결혼 생활을 유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런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하지만 아이는 낳았고, 싱글맘으로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사실. 이후 도쿄의 번잡스러운 삶은 자신을 말려죽였기에 침몰가족을 홀연히 떠나 섬으로 갔다는 사실. 그것들은 그냥 사실들이다. 호코는 지금까지도 그 섬에서 활동지원사로 일하며 공동체를 가꾸어 나간다. 인간해방(人間解放)을 쓰는 가노 호코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린다. 아들과 있을 때보다 동네 사람들과 있을 때 더 활발해지는 가노 호코는 책임감과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가노 쓰치 감독은 엄마인 가노 호코에게 자막을 단다. 어쩌다 태어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