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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죽음, 살인, 폭력, 고문, 배신, 공포가 일상이 된다면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미국 시카고 마피아 조직의 보스 '알 카포네'가 도시를 점령한 때가 있었다. 시카고의 모든 것이 실질적으로 카포네의 소유였지만, 겉으론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세상 전부를 지배하던 폭력과 부조리의 역사는 약 20년간 이어졌다. 카포네의 실질적 전성기였던 1920년대, 탈세로 교도소에 수감됐어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1930년대, 저물어갈 때조차 여전히 보스이며 상징적인 존재였던 1940년대까지. 이러한 혼돈과 공포의 시대에 여성이 생존할 방법은 다양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자를 이용하거나, 남자의 보호를 받거나, 남자를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거나.


제스로컴튼 프로덕션 원작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여 최고의 히트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1년 후 2015년, 지이선 각색·김태형 연출의 조합으로 한국에서 초연됐다. 극은 한 에피소드당 100석의 좌석, 마주 보는 두 객석을 사이에 둔 실제 호텔 객실을 연상시키는 비좁은 무대, 좁은 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스케일 큰 서사와 임팩트 있는 캐릭터들, 에피소드마다 확실히 구분되는 톤 앤 매너로 큰 화제를 모으며 전석 매진, 흥행 신화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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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로키>, 서스펜스 드라마 <루시퍼>, 느와르 <빈디치> 3부작으로 구성된 <카포네 트릴로지>는 한 에피소드만 봐도 무방하다. 그래도 실질적으론 세 에피소드를 모두 봐야 극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세 에피소드에 모두 등장하는 빨간 풍선 오브제, 몰라도 괜찮지만 알면 작품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연계 설정(1943년 배경 빈디치의 두스·빈디치 두 경찰들이 과거 로키·루시퍼 사건을 수사하는 장면, 1923년 로키에서 객실에 숨겨둔 독약이 1943년 빈디치에 다시 등장하는 것, 1934년 루시퍼의 말린이 로키의 롤라 킨을 언급하는 부분, 1923년 로키에서 두 형사들이 말하는 추리 소설 내용이 루시퍼·빈디치 에피소드 내용인 점 등), 세 에피소드에 모두 나오는 공통 대사들('전형적인 범인의 대사', '당신 품에서 숨 쉴 때가 제일 편해'), 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믿음'이란 테마까지. 한국으로 작품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더해진 빨간 풍선 설정 및 여러 디테일들로 인해 극은 세 에피소드의 연결성을 더 밀도 높게 구성했다.


2025년 10주년을 맞이한 <카포네 트릴로지>는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3월 11일에 개막했으며 6월 7일에 막을 내린다. 로키에선 데이빗·광대 외 다역, 루시퍼에선 닉 니티, 빈디치에선 두스를 연기하는 올드맨엔 이석준, 정성일, 김주헌이 캐스팅됐다. 로키에서 니코·광대 외 다역, 루시퍼의 마이클, 빈디치에선 빈디치로 분하는 영맨엔 김도빈, 최호승, 최정우가 출연한다. 로키에선 롤라 킨, 루시퍼에선 말린, 빈디치는 루시로 등장하는 레이디는 임강희, 정우연, 김주연이 연기한다.


로키의 롤라 킨, 루시퍼의 말린, 빈디치의 루시. 잔인한 시대를 살아온 세 명의 레이디들은 시카고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떠났을까. 1923년을 살던 은퇴한 쇼걸 '롤라 킨'은 남자들을 이용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마지막 쇼를 마친 그녀는 쇼걸 의상을 벗어 던지고, 수녀 옷을 입고선 렉싱턴 호텔 661호를 살아서 빠져나갔다. 1934년, 조직의 이인자 닉 니티의 사랑스러운 아내 '말린'은 한때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의 새장인 661호에서 보호받길 자처했다. 하지만 말린도 마피아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도 661호를 살아서 나가긴 했다. 1943년, 부패한 경찰청장 두스의 딸 '루시'는 어머니와 자신의 인생을 파괴한 아버지 두스에게 복수하길 원했다. 그래서 친구 남편이자 아버지의 옛 후배였던 빈디치를 이용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에게 마음 일부를 내어주는 실수를 저질렀기에 661호에서 생을 끝내야 했다.


 


아직도 사랑을 믿어? 아직도 희망을 믿어? - 파멸의 광대 <로키> '롤라 킨'


 

렉싱턴 호텔 바에서 일하다 은퇴 후, 돈 많은 회계사와 결혼을 앞둔 전직 쇼걸 롤라. 그녀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자신을 찾아온 두 광대를 만난다. 그들은 롤라를 살인자라 하며, 그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롤라는 결혼식 전날 하루 동안 렉싱턴 호텔 661호에 머물며 조우한 남자들을 회상한다. 그중에 자신이 죽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약혼자 데이빗, 내연남 니코, 호텔 직원 번, 마피아 조직원 볼디, 두 형사들, 아버지 중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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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는 평생을 여러 남자들에게 시달려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때때로 맞았으며,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독립해 얻은 직업은 쇼걸이었기에 남자들의 직접적인 추근거림과 비밀스러운 접근은 일상이었다. 렉싱턴 호텔뿐만 아니라 시카고 전체가 알 카포네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마피아에게 빚을 지며 일했다. 마피아와 연관 없는 회계사 데이빗을 겨우 잡아 결혼에 성공하며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듯했지만, 그도 롤라를 괴롭힌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 결혼식 전날에 롤라가 머무는 객실에 찾아와 들여보내달라고 징그럽게 우기기 때문이다.


연인 혹은 내연남, 사랑했었고 아직 사랑한다 믿고 싶은 니코는 사람을 죽이고 객실에 시체를 끌고 왔다. 약혼자 데이빗과 내연남 니코를 어떻게 들여보낼지 조율하는 호텔 직원 번은 팁을 달라고 문 앞에서 지겹게도 칭얼댄다. 수상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두 형사들은 롤라의 거짓말에 속는 바보인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추근댄다. 보스인 카포네의 조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온 조직원 볼디는 롤라의 목숨은 금세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다.


극은 블랙코미디이며 롤라는 거짓말에 능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다. 따라서 남자들이 롤라를 귀찮게 하는 상황들, 그녀가 위기를 모면하며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극은 속도감과 웃음으로 승화한다. 귀찮게 구는 약혼자 데이빗은 카포네 조카를 죽인 내연남 니코라 속여 조직원 볼디에게 넘긴다. 두 형사들에겐 자신이 롤라의 일란성 쌍둥이 언니인 추리소설 작가 겸 수녀라는 변명을 한다. 팁을 달라고 징징대는 문밖 호텔 직원 번의 손을 잡아 가슴에 갖다 대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딸 결혼 앞에서 뒤늦게 후회되는지, 옛일을 사과하는 아버지에겐 얼른 주무시란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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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지만, 내연남 니코에겐 볼디를 처리했단 말을 못 해, 궁지에 몰린 니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결말까지 블랙코미디의 완성이다. 마지막 쇼를 끝낸 롤라는 쇼걸 옷을 벗고, 니코가 살해한 수녀 옷으로 갈아입는다. 남자들을 자신의 인생에서 죽이고, 수녀의 시신에 웨딩드레스를 입히며 자신조차 죽인 롤라는 이름 없는 수녀가 돼 가장행렬 속에 섞인다.


세 에피소드 중 레이디가 주인공인 로키인 만큼 롤라에게 부여된 서사는 탄탄하다. '은퇴한 쇼걸이 수녀가 돼 남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설정 또한 유쾌함, 씁쓸함, 해방감과 통쾌함, 은근한 감동마저 준다. 평생을 남자들에게 지겹게 시달려온 롤라가, 남자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수녀가 돼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661호를 빠져나갈 땐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1920년대, 시카고, 마피아, 쇼걸 등 2025년 대한민국을 사는 관객과는 상관없어 보이면서도 롤라가 겪는 일 중 일부는 이상하게 남 일 같지 않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여성일지라도, 남자들로부터의 원하지 않는 기분 나쁜 추근거림은 인생을 살면서 안 겪어보기가 힘든 일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기꾼에 나쁜 여자라 하는 이기적인 쇼걸 롤라일지라도, 수녀복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완전히 자유로워져 661호를 박차고 나갈 땐 뜨거운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말린, 제발 나 무서워하지 마 - 타락천사 <루시퍼> '말린'


 

카포네 조직 이인자이자 실무자인 닉 니티의 아내, 말린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세 에피소드 레이디들 중 옷을 가장 많이 갈아입고, 가장 많이 웃는다. 닉 니티는 자신과 말린을 '늙고 못생긴 나'와 '젊고 아름다운 당신'이라 말한다. 말린은 닉 눈에만 사랑스러운 건 아니다. 그녀는 남편과 식사하러 레스토랑에 갈 때조차 웨이터의 눈길을 빼앗아버리는 매력적인 여성이다. 말린은 닉이 제공하는 안전한 요새,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닉 돈으로 마음껏 쇼핑하고, 성악도 배우고, 덤벙대는 습관조차 챙겨주며 사랑스럽게 봐주는 남편이 늘 곁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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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말린은 마피아 가문의 딸이다. 겉으론 무해하고 사랑스럽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척 해도, 속으론 늘 어릴 때부터 학습해 온 불안과 공포를 견디고 있다. 직원용 룸으로 쓰였던 좁은 661호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것도 답답하다. 닉은 렉싱턴 호텔의 펜트하우스는 우리에겐 안 어울리고, 이 정도 방이 우리에게 딱 맞다며 말린의 숨 막히는 감각을 가볍게 무시한다. 661호에서 평생을 산다면 당연히 아이를 갖는 건 불가능하다. 말린은 사촌인 경찰 마이클의 아이들에게 줄 옷과 신발을 준비하면서도 쓸쓸한 마음을 숨기려는 듯 더 밝게 웃는다. 위험한 일은 안 한다고, 실무만 담당한다던 닉은 옷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비틀대는 모습으로 방에 들어오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안 해준다. 내 곁이, 이 방이 제일 안전하다면서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건 감추는 닉은 말린을 동등한 인격체나 가족으로 대한다기보다 지켜야 할 나약한 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다.


닉은 말린의 삼촌이자 마이클의 아버지인 조조, 즉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들 중 하나인 그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교통사고. 그렇지만 계획은 실패한다. 교통사고가 난 조조의 차 안에는 마이클의 아이들, 즉 말린 조카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자 죄를 저지른 닉 앞에서 말린은 미쳐간다. 닉은 말린을 장례식장조차 못 가게 막는다. 닉이 아내 말린에게 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통제와 가스라이팅이었고, 사랑이 아니라 뒤틀린 소유욕이었다. 한순간에 자식들을 잃은 마이클이 눈이 돌아버린 채 닉에게 복수하러 오는 것은 예상한 결과다. 목숨 걸고 덤벼드는 마이클과 그를 막아서는 닉의 싸움은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처럼 치열하다. 말린을 사랑하면서도 입맛대로 통제하려던 닉은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과 직면한다. 닉을 경멸하게 된 말린은 사촌 마이클을 택한다. 말린은 마피아 가문의 딸답게 가족을 택하며 닉에게 차갑게 등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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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싸움은 창문에서의 추락으로 이어지고, 말린은 661호를 나가며 극은 끝난다. 극에선 뒤 상황을 암시하지 않고 열린 결말로 끝냈기 때문에 루시퍼는 세 에피소드 중 뒷맛이 가장 찜찜하고 씁쓸하다. 9년 뒤 에피소드인 빈디치에서 두 경찰들은 이 사건을 수사하며 관객에게 말린의 죽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남편이 만든 요새, 보호받던 새장에서 뒤늦게라도 벗어나는 걸 택했지만 결말은 비극이었기에 말린의 해맑은 웃음이 더 안타까운 에피소드다. 루시퍼는 조직의 일인자를 꿈꾸던 한 남자의 추락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에피소드지만, 평범함을 꿈꾸고 행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한 여자가 비극을 향해 추락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자 카포네의 탄생! - 복수의 화신 <빈디치> '루시'


 

시카고에 남은 마지막 정의, 멸종한 공룡 같은 전직 경찰 빈디치. 그는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아내 그레이스와 6개월째 살고 있다. 그레이스는 산 사람이 아닌, 방부 처리된 시신이다. 그레이스의 생명을 빼앗아 간 이에게 복수하려는 빈디치는 여러모로 시카고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 경찰일 땐 정의롭고 청렴결백했으며, 아내 그레이스만 바라보고 사랑하는 순진한 남편이었다. 과거 상사이자 현재는 경찰청장인 두스와는 정반대였다. 1923년 롤라 킨 사망 사건(로키), 1934년 두 남자가 661호에서 추락, 실종된 사건(루시퍼)을 수사하던 두스는 배후에 악과 권력이 도사리고 있단 걸 직감하고 진실을 묻는다. 두스처럼 악에 결탁할 생각조차 못 하고, 직급도 낮은 평범한 경찰이었기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의를 구현하며 열심히 일하던 빈디치는 어느 날 승진을 한다. 빈디치는 기뻐한다. 승진 과정에 아내 그레이스가 어떤 선택과 희생을 했을지 순진한 빈디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루시는 빈디치의 복수 대상인 경찰청장 두스의 딸이다. 그녀는 빈디치의 복수 파트너이며, 그레이스의 친구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일부러 낸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한쪽 눈을 잃은 루시는 잃어버린 눈을 안대로 감췄다. 루시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신비롭고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운 여자다. 무표정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은 안대는 그녀의 마음과 생각을 숨기는 가면이자 방패다. 그녀는 시카고를 지배하는 거대한 악, 두스에게 복수하기엔 나약하고 순진한 빈디치를 리드한다. 부패하고 더러운 경찰인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그의 부와 권력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아왔기에, 루시는 복수 계획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그 무대에 배우로 오를 빈디치를 연출한다. 아내 그레이스만을 사랑하는 빈디치도, 스스로 감정을 차단한 것 같은 차가운 루시도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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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와 빈디치가 함께 설치한 661호란 덫에 사냥감 두스는 쉽게 걸려든다. 늙고 추악한 두스를 조롱하고, 고문하는 빈디치는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듣는다. 그레이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후엔 루시가 있단 것이다. 고위 경찰이란 권력을 가지고, 마피아와도 결탁해 여자들을 마음껏 갈아치우는 아버지 두스의 딸로 안전히 살아남기 위해 루시는 그에게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소개해 줬다. 그 여성들 중 빈디치의 아내이자 자신의 친구인 그레이스도 있던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목숨 걸고 일하는 남편 빈디치를 늘 걱정해 온 그레이스는, 그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루시의 소개를 받고 남편 상사 두스를 만난다. 몇 번의 만남 끝에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갖게 된 그레이스는 죄책감에 목숨을 끊는다. 빈디치는 루시가 악의 시작이었단 걸 알고 복수 대상을 루시로 바꾼다.


두스에게 복수하기 위한 연기를 연습할 때 허술했던 빈디치는, 그 순간만큼은 인생 연기를 선보인다. 루시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는 빈디치는 총으로 루시를 쏴 살해하고, 자신도 독약을 먹고 아내 그레이스 시신 옆에 눕는다. 추한 모습으로 붙잡혀 있던 두스는 딸의 죽음에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빈디치를 비웃으며 661호를 서둘러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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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가 아는 남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는 추악한 두스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친구 그레이스의 남편인 빈디치는 멸종한 공룡처럼 희귀했을 것이며, 시시할 정도로 평범하고 순진했기에 욕심도 났을 것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평범함과 행복을 가진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빈디치를 잘 알아버리게 된 루시는 부부의 평화를 파괴한다. 남편을 사랑하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이용해 그녀를 두스에게 소개한 것이다. 그레이스의 죽음은 예상 밖이었다. 빠르게 계획을 수정하는 루시는 빈디치를 이용해 아버지 두스를 살해하고, 빈디치도 처리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고, 여자 카포네가 되려는 대담한 꿈을 꾼다. 하지만 그 계획은 두스의 배신(아내를 살해한 사람이 딸도 배신하는 건 별일 아니었을 것이다), 또 자신도 모르게 품어버린 빈디치에 대한 마음으로 인해 실패와 죽음으로 끝난다.


늙은 두스만이 탈출한 661호엔 세 구의 젊은 시신이 잠든다. 6개월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레이스의 시신 옆엔 빈디치가 독약을 먹고 잠들었고, 침대 맞은편 화장대 밑엔 빈디치의 총을 맞은 루시가 쓰러졌다. 빈디치와 그레이스는 죽어서도 함께였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잠든 루시는 죽어서도 그들에게 닿지 못한다. 그건 여자 카포네가 되고 싶었으면서도 한편으론 평범함을 꿈꿨던 루시가 받는 가장 큰 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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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가 지배했던 시카고라는 한계에서도, <카포네 트릴로지>의 세 레이디들은 각자 자리에서 주체적인 행동을 했다. 롤라 킨·말린·루시와는 달리 빈디치 에피소드의 주요 캐릭터인 그레이스는 녹음된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루시, 빈디치, 두스에 의해 묘사되는 그레이스는 청순하고 아름다우며 선하고 순진하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그녀의 서사 때문인지 극에서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소모되고 대상화되는 건 아쉽다.


세 에피소드에 모두 나오는 빨간 풍선은 평범한 삶, 평범한 행복을 상징한다. 로키의 롤라 킨은 니코에게 선물 받은 빨간 풍선을 들고 661호를 나가고, 루시퍼의 말린은 빨간 풍선을 가졌었지만 남편 닉에 의해 풍선은 터져버린다. 빈디치의 그레이스는 남편 빈디치가 사 온 빨간 풍선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루시는 빨간 풍선을 증오한다. 또한 롤라 킨·말린·루시 세 여성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가면을 썼다 벗거나, 혹은 엔딩에서 가면을 쓴다. 롤라 킨은 수녀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유로운 삶을 향해 떠나고, 말린은 불안과 공포를 웃음이라는 가면으로 회피했다. 루시는 잃어버린 한쪽 눈을 가리기 위해 안대라는 가면을 썼지만 감정을 철저하게 감추는 수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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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 킨은 머리가 좋으면서도 이기적이고 뻔뻔하다. 욕설도 시원하게 내뱉는 그녀는 자신을 나쁜 여자라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 레이디들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으며, 배신의 도시 시카고에서도 잘 살아 나갈 것이다. 말린은 사랑스럽고 무해한 웃음을 가졌으면서도, 마피아 가문 딸이자 조직 이인자의 아내였기에 불안하고 공허했다. 루시는 차갑고 과감했으며 이기적이고 악했지만, 깊은 속내엔 슬픔과 고독, 평범함에 대한 동경과 연약함을 간직했다.


그녀들은 남자를 사랑했으며, 동시에 사랑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성들의 다양한 특성과 감정들을 <카포네 트릴로지>는 세 캐릭터에 나눠 녹여냈다. 하지만, 이 특성들은 한 여자가 한꺼번에 가질 수 있는 입체적인 다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2025년 대한민국을 사는 여성 관객들은 여전히 <카포네 트릴로지>에 열광한다. 먼 과거,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롤라 킨·말린·루시는 '나' 같기도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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