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영화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가오리: 어렸을 때 지금처럼 되고 싶었어요?
사토: 네? 잘 모르겠는데요.
가오리: 저는요, 되고 싶지 않았어요.
어릴 땐 누구나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기 마련이다. 주변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 되고, 꿈을 이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과연 이 세상에 어릴 때 꿈꾸었던 바로 그 모습의 어른이 된 사람이 있을까.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가면서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어쩌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어릴 적에 꿈꾸던 그런 내 모습은 실현할 수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서른」도 역시 원하는 모습의 어른이 되는 데 실패한 수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수인은 십 년 전에는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을 느끼는 서른 살이 되었다. 그런 수인의 서른을 만든 이십 대의 중심에는 ‘다단계’라는 커다란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소화해 내기는커녕 목구멍에 걸려서 아직 삼켜내지도 못한 이 고통의 기억을 수인은 십 년 만에 소식이 닿은 성화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과정을 통해 솔직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서른」의 배경이 되는 것은 2011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거마대학생’ 불법 다단계 사건이다. 취직을 시켜 주겠다는 불법 다단계 업체의 속임수에 넘어간 수천 명의 대학생이 송파구 거여·마천동 일대에서 강제로 합숙하며 사람들에게 회사의 물건을 팔았다. 업체가 경찰에 적발된 후 처벌을 받은 것은 업체 관계자와 수익이 높은 상위 판매자뿐이었지만, 사실 그곳에 완전무결한 피해자는 없었다. 등록금과 취업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던 순진한 대학생들은 판매원이 된 후 자연스럽게 온갖 불법행위에 가담했다. 그들은 서류를 꾸며 대출을 받고 원가를 수십 배 불린 값에 물건을 판매하며 거짓말로 새로운 사람들을 판매원으로 끌어들였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부모의 도움으로 합숙소에서 빠져나오고도 제 발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불법 다단계 업체에 사기와 감금을 당했던 피해자는 순식간에 그와 공모한 가해자가 되었다.
「서른」의 주인공 수인도 처음에는 옛 애인의 소개로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다단계 업체의 속임수에 넘어간 안타까운 피해자였다. 그는 창문에는 쇠창살이, 신발장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는 합숙소에 감금된 채 강제로 지인들에게 품질이 낮은 생필품과 건강식품을 비싼 값에 팔았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 그렇게 이상한 일일 리 없다’고 자기암시를 걸”면서 “그 일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 애”쓰던 그는 결국 자신의 면목동 학원 제자 혜미마저 새로운 하부 판매원으로 집어넣는다. 이후 빚더미에 올라앉은 혜미가 자살 시도를 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들으면서 수인은 한순간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가해자로 전락한다. 선생이란 직함을 달고서 자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잘 따르던 소중한 제자를 다단계에 끌어들여 낭떠러지로 몰고 간 괴물이 된 것이다.
이때 김애란 작가는 그런 수인에게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를 전할 기회를 준다. “저 바보 같죠? 근데, 거기 있으면 그렇게 돼요, 진짜로.”라거나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그의 말은 일관되게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하나의 진술을 향해 나아간다. 누군가는 이러한 수인의 말들이 단지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수인 개인의 도덕성 결여를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 수인의 목소리에 독자들이 귀를 기울이게 하면서 정말로 무엇인가가 수인의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십 년 전 “부모님께 효도해야 된다는 각오로 충남에서 올라”와 재수를 한 수인의 삶은 J대 불문과에 합격한 이후에도 순탄치 않았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받은 성적 장학금과 근로 장학금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합쳐도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모에게 손을 벌리기는커녕 오히려 편의점과 서빙, 병원 생동성 시험, 보습학원 강의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집안에 보탬이 되려고 애썼다. “이 모든 게 경험과 지혜로 남아 저를 성장시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칠 년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도 미래를 낙관하며 고된 대학 생활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이 되어서도 불행은 엎친 데 덮치듯 늘어만 갔다. 여전히 천만 원의 학자금대출이 남아 있었으나 일자리는 생각보다 쉽게 구해지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가세가 기울고 집주인은 월세와 보증금을 올렸다.
만약 수인의 집안 형편이 조금이라도 더 나았다면, 수인이 지방이 아닌 서울 출신이었다면, 불문과가 아닌 경영학과를 나왔다면, 그래서 취직이 생각보다 빨리 됐다면, 수인의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지 않고 집주인이 보증금과 월세를 올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수인은 애초에 “한 달에 3백만 원, 많게는 천만 원도 벌 수 있다는” 이상한 회사에 들어가지도, 그래서 지금처럼 혜미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인의 전 애인과 혜미도 마찬가지다. 만약 수인의 전 애인이 그저 논문을 열심히 썼다는 이유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가 멀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타나 수인을 다단계에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혜미가 이름 없는 지방 대학을 나와 영화관에서 팝콘을 팔며 반백수로 살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가 연예기획사 인턴 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수인의 뜬금없는 제안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매 순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던 수인이 혜미에게 커다란 죄를 짓고 여생을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야 하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은 분명 수인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다. 수인의 배후에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21세기, 다시 말해 노력과 결과의 비례성을 파괴해 나가는 동시에 그것을 더 절실히 ‘믿고 싶게 만드는’ 위선적인 세상이 있다. 신자유주의 자본 축적 모델 속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린 개체화된 경제 주체들은 자신이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만성적인 불안감에 휩싸인 채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낙오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수인의 절박함은 다단계 시스템의 돈벌이 수단으로 완전히 이용당했다.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보여주어 수인의 믿음과 욕망을 부추기는 다단계 업체와 그것을 방임하는 사회,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수인. 혜미가 식물인간이 된 것은 아마도 그 모든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만들어낸 안타까운 결과일 테다.
그럼에도 김애란 작가의 소설 「서른」은 단순히 개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고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사회 구조에 속해 있는 아주 작은 개인이 ‘고백’을 통해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이 작품은 수인이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십 년 전 사임당독서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수인을 따뜻하게 대해줬던 성화 언니다. 그는 수인이 “만일 제가 언니의 아기라면 내 엄마가 언니란 사실이 무척 기뻤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여전히 수인에게 큰 존재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수인이 자신의 이상향과 같은 존재인 성화 언니를 향해 혜미에게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한 걸음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장의 신호다.
만일 수인이 언니에게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 글은 여전히 그만한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이 글에 대한 성화 언니의 반응이 아니라, 성화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수인의 진솔한 성찰과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기 때문이다. 수인이 지난 십 년을 반추하며 글로 적어 내려가게 된 것은 십 년 전 사임당독서실에서 함께 생활했던 성화 언니가 보내온 소포에 답장을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수인이 펜을 들게 된 확실한 계기는 성화 언니가 보낸 엽서보다도 십 년 전 자기가 성화 언니에게 선물했던,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힌 뚜레쥬르 적립 카드였을 것이다. 수인이 “비석처럼 거기 그 네모난 칸에 적힌, 먼 과거에서 배달된 제 이름”을 보는 순간은, 수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스무 살의 순수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다 써놓고 끝내 부치지 못할지라도, 오늘 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는 수인의 표현은 언니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늘 도망치고 싶었던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를 이제는 똑바로 바라보고 바로잡겠다는 다짐이 된다. 이렇게 고통을 주는 삶의 경험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글로 쓰는 수인의 표현적 글쓰기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읽힐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로 나아간다.
지난해 9월, 김애란 작가의 13년 만의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출간을 기념하는 북토크가 서울에서 열렸다.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묻는 신형철 평론가의 질문에 대해 김애란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을 차분하게 승인해 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진실은 이야기의 형태가 아니라면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2011년 작 「서른」은 이러한 작가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겁한 행동을 해 결국에는 제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한 어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인의 죄는 누구라도 용서하기 힘든 종류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고행과 같은 글쓰기의 여정 끝에 수인이 고백하는 죄책감과 혜미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그에게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에도 사연이 있을 수 있고, 죄인에게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상식과 도덕, 법률이 쌓아둔 견고한 벽 너머로 수인의 이야기를 바라본 독자만이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열매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