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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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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미술사, 예술학 등의 학문에 관심이 있다면 듣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철학자들의 이름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학부 시절 나는 수강 시간표를 대부분 미학과 미술사 강의들로 채워 놓았고 벤야민의 이름은 전공 시간에서도, 교양 시간에서도 숱하게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매체이론을 다루던 교양 강의에서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접하며 어떻게 이런 글을 썼는지 감탄이 나왔던 것 또한.


학자로서의 벤야민은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그가 생전 소설, 꿈, 설화, 우화, 비유담, 수수께끼 같은 문학작품들 또한 썼다는 사실은 <고독의 이야기들> 번역 출간 소식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발터 벤야민이 쓴 소설, 꿈 기록, 설화 등을 처음으로 한데 모은 문학작품집이다. 벤야민이 살아 있을 때 발표된 글들도 있지만 이 책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발표되지 않았던 글들이다. 책은 다양한 형식, 소재, 그리고 주제로 쓰인 글들을 총 3부로 나누어 전한다. ‘1부 꿈과 몽상,’ ‘2부 여행과 이동,’ ‘3부 놀이와 교육론’이다. 이 문학작품집에 실린 글들은 대개 꿈과 환영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이 구분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책을 엮는 과정에서 각 부의 이름과 직결된 주제의 서평을 각 부의 끝부분마다 배치해 구성력을 강화하였다.


책의 3부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1부 꿈과 몽상’이었다. 말그대로 벤야민이 직접 꾼 꿈을 적은 꿈 일기, 그리고 몽상담을 적은 글들이 모여 있다. 벤야민에게 익숙했을 여러 문인과 철학자들이 그의 꿈속에서 난쟁이, 요정, 묘령의 길잡이, 성채 모양의 거인 등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연구가 일상생활과 분리가 안 될 만큼 연구에 긴 시간을 들이고 단순한 동작을 하며 머리를 쉴 때마저도 중간중간 논문 생각을 하는 대학원생의 모습이 엿보여서 잠시 뒷목이 서늘해졌다. 고로 내가 1부에서 좋아한 점은 이것이 아니었다. 다만 1부에서 전반적으로 보이는 유럽 배경의 환영적인(visionary) 분위기 자체가 좋았다.


이는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취향의 작용 탓이다. 프록 코트와 고수 머리, 중절모 같은 단어에서 어릴 적 읽었던 유럽 작가들의 중단편 특유의 분위기가 떠올라 엷은 친밀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고딕 교회의 첨탑, 그 교회와 마을을 장식하는 성인들의 조각상, 끝도 없이 높이 가거나 끝도 없이 멀리 가고 싶어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는 이름 모를 존재들이 회색 연기처럼 투명하게 사라지는 듯한 묘연함의 묘사에서는 한동안 공부했었던 서양 근세 회화의 환영적인 특징이 연결되어 보였다. 딱히 완결이 없는 꿈과 몽상의 기록은 꿈과 몽상이 가지는 허깨비 같은 성격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데, 허깨비 중에서도 유러피안 허깨비를 보는 데 약간은 잔뼈가 있던 나는 그것을 정돈하며 맺고 끊어 읽기보다는 일종의 이미지 게임처럼 즐길 수 있었다. 유럽 배경의 몽상적인 이야기라는 코드 자체로 내게는 이미 호감과 익숙함이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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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가끔 친구에게 내가 구상한 만화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미리 써 두고 친구에게 읽어 달라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완성작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다음 편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친구는 내 멱살을 잡는 시늉을 하고 내 상체를 짤짤 흔들었다. 이럴 거면 궁금하게 만들지 말라고! 친구의 심정을 몇 해가 지난 지금 알게 되었다. ‘2부 여행과 이동’으로 가면 글마다 서사는 더 늘어 있지만 꿈과 몽상보다 이야기가 형체를 갖춘 만큼 미완성의 글에서 뚝 끊어지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벤야민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혹은 다른 환경에 있었더라면 이 글 조각 중 몇 편은 소설이 되었을까? 그랬다면 화자가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글 속의 청자에게 들려주고 그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이 미완의 이야기들이 어떤 메세지를 담고 누구에게까지 가닿았을까? 톨킨의 대작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첫 시작이 제자가 제출한 빈 답안지와 그것을 채점하던 방에 깔린 카펫의 구멍이었으니 어쩌면 벤야민도 몽상적인 기록에서 서사시를 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안타까움에서 오는 꿈과 같은 가정이다.


확실한 건, 이 책은 문필가 벤야민의 저술 세계를 일목요연하고 명명백백히 연구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 자리에서 쭉 읽기보다는 다양한 장소에 걸쳐 끊어 읽는 편이 더 흡인력 있게 잘 읽힌다는 점이다. 일과와 일과 사이 막간의 휴식 시간에, 벤야민과 연관 없는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여운이 어느 정도 소화된 후에, 환승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에 읽기 좋았다. 마치 2부 끝부분에 실린, 벤야민이 경쾌하게 적어내려간 서평에서 만날 수 있는 ‘공항과 역에서 산 추리 소설을 여행자가 집중해 읽는’ 그 감각처럼.


2부의 추리 소설 서평에서 빛났던 벤야민의 경쾌한 집필과 재치 있는 표현은 ‘3부 놀이와 교육론’에 나오는 서평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교육을 위한 책이지만 아이들을 지루하고 경직되게 할 것이 아니라 그 나이대 아이들의 뛰어난 능력인 놀이의 감각을 활용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좋은 책이라는 벤야민의 평이 여전히 신선한 관점 같아 기억에 남는다.


대주제별로 만든 3부 구성 외에도 한 작가의 것으로 통일된 삽화들이 <고독의 이야기들>로 엮인 부유하는 환영들에 무게감과 조직력을 더한다. 삽화로 들어간 것은 발터 벤야민이 사랑한 화가로 알려진 파울 클레 그림들이다. 단편 글의 앞, 각 부의 앞 장마다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이 묘하게 글의 소재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발터 벤야민의 조각글과 노벨레 및 서평이 파울 클레의 단순하거나 구체적인 형상의 그림들과 어떤 합을 이루고 있는지 직접 느껴 보는 것 또한 <고독한 이야기들>을 감상하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고독한 이야기들 >은 독자들이 문학가 벤야민의 꿈 기록, 구전의 형태를 차용하는 이야기들과 동시대 연구 및 도서에 대한 평론을 한 권으로 만나 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난해한 백일몽의 상영 시간에서 그치지 않고 독자 여러분의 몽상은 어떤 성향의 환영에 걸쳐 있는지, 낮의 가치관과 밤의 몽상이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새삼 돌이켜 볼 수 있는 고독하지만 풍요로운 여행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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