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이상한나라의춘자씨 포스터.jpg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그 10년 동안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짧은 기억을 헤집었다. 어리석은 만큼 순수했던 20대를 지나 조금 단단해진, 실은 그만큼 고루해진 나를 본다. 더러 받아들였고,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은 테두리를 그어 마음 바깥으로 밀어두었다, 어른답게. 이게 소위 이상적 어른을 논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다들 이해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내 시간은 살아온 것보다도 더, 많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많이, 너무 많이 변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은 조금 착잡하다. 나는 어디까지 와있고, 장차 어디로 변해갈 것인가. 살아간다는 건 변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뇌까린다, 어린놈이 읊어보기엔 언제까지나 섣부른 것임을 생각하면서도. 왜 내가 이런 얘기로 서론을 늘어놓느냐 하면, 이번 연극은 ‘노인’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당신의 유산이다. 나는 당신의 등을 보며 자랐고, 그건 참 쓸쓸해 보였다.


*


안타깝게도,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이하, 춘자씨)의 장르는 뮤지컬이다. 그것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명랑하고 산뜻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선입견일까, 다시 생각해보아도 저 장르에 대한 나의 입장은 쉽사리 변치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내면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음악이란, 적어도 표현 수단으로서의 음악이란 완화 장치로 다가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만큼 덜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이번 공연도 과연 그러했다. 치매 노인 춘자의 환상을 따라가는 극의 서사는 기묘하고 유쾌하다. 제목이 이미 가리키는바, 서사의 구조와 형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물고기와 쇠파리떼, 와이퍼 남매는 분명 환상으로서의 존재이지만, 극의 특성상 자연스레 용인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음악들이란 명랑하다. 다만, 나는 그녀의 일상이 지니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보고 싶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어디까지나 처음엔 그랬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공연사진 (1).jpg

 

 

‘자식들과 외식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고 혼자가 된 춘자는 느닷없이 물고기를 만난다. 그 물고기는 그녀의 몸속에 있던 감정과 기억의 원형이고, 춘자에게 ‘이상의 대지’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그녀가 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있다. 춘자는 환상 속에서 그곳을 향해가고, 현실의 가족들은 그런 춘자를 추적한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줄거리.


간소화된 줄거리가 일러주듯 ‘물고기’는 이 환상극의 이정표이자 길라잡이로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람이 기쁨, 설렘, 초조함과 불안을 느낄 때 아랫배가 떨리는 것은, 사실 자신이 몸부림치는 것이었다고 물고기는 말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 안에 사는 물고기는 줄어들고 눈물로, 혹은 오줌으로 쑥하고 빠져나갈 때마다 무언갈 잃어가고 점점 무감해진다는 말이 괜시리 좋았다. 나는 그게, 내가 경계 지어 마음 바깥으로 밀어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설정이 괜히 마음을 툭 치고 지나간다. 서른에 접어든 나는 어딘가 고루해졌기에. 그건 살아가기에 몹시 편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잃어버린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삶이 십상 녹록잖다고 생각한 이유는 내 안에 누구보다 많은 물고기들이 살았던 까닭이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아랫배가 떨렸고, 그것은 기쁨으로 또 불안으로 시종일관 부르르르 떨리곤 했다. 바이킹을 타는 듯한 삶. 나는 그게 싫어서, 또는 성가셔서 오줌으로 전부 다 배출했다. 잔 떨림이 사라진 일상은 바야흐로 고요했고, 그와 동시에 어딘가 무감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바삐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사소한 것에도 떨어대는 자신이 어수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떨지 않는 어엿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아이는 그것들을 하나둘씩 버린다. 그렇게 어른이 된 사람은 또 다른 아이를 마주하며 자신이 무엇을 버렸고, 그때 버린 것에 의도한 것과 의도치 않은 것, 버리기를 희망한 것과 채 희망하지 않은 것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삶에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버렸고, 그 결과 무엇을 잃었을까. 내가 연못이라면, 이 안에 남은 물고기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공연사진 (13).jpg

 

 

우화의 주요 소재로 물고기만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연극을 물고기에 대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다른 것까지 다 담아 한 줄로 엮어보기에 내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 쇠파리떼의 우화, 와이퍼 남매의 우화 등 다른 환상들에 얽힌 에피소드도 각각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그건 직접 보고 느끼시는 편이 좋겠다.


쇠파리 떼의 우화를 간략히 소개하는 거로 리뷰 슬슬 마친다. 물고기의 인도로 이상의 대지를 향해 가던 춘자씨는 쇠파리 떼를 만난다. 물고기가 춘자에게 어려지는 약, 젊음의 묘약을 주었다면 쇠파리 떼는 춘자에게 노화의 환약을 권한다. 젊음의 묘약은 잊어버린 어린 날의 소망을 위해, 노화의 환약은 이상의 대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일찍이 젊음의 묘약을 너무 많이 복용한 탓에, 춘자는 노화의 환약을 먹고서 마침내 이상의 대지에 도달한다. 거기엔 일찍이 떠나버린 남편과 마찬가지 너무 일찍 죽어버린 딸,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다. 왜 ‘늙어지는 약’을 먹어야 이곳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춘자는 그리운 얼굴들과 만났고 현실의 가족들은 그 순간 춘자를 찾아낸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공연사진 (3).jpg

 

 

뮤지컬을 보고 있으면, 이 장르 자체가 어쩜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불러일으키고자 애쓰는 듯한 인상이 들곤 한다. 춘자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 예컨대 노화와 치매와 소외, 그리고 그것들이 공전하는 삶의 궤도가 그 자체로 유쾌할 리 만무하고 극도 딱히 그러한 것들을 화면 밖으로 깡그리 밀어놓지 않았지만, 무대 위에 연출된 그것들이 조금 따스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동심을 지키려는 듯한 느낌.


극이 동심을 지켜내려 애쓸 때마다 나는 조금 삐딱해지는 편이다. ‘차라리 속 시원히 까발리는 편이 좋지 않은가?’ 하는 투로 고개를 모로 돌리곤 하지만, 연극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그걸 모르랴. 하지만 그렇게 해서 네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그러고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마주하고 나서야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 ‘버리고 싶었던 것은 어리숙함이었지만, 잃어버린 것은 아랫배의 떨림 전부.’ 당황과 불안을 버리기 위해, 기대와 설렘까지 버렸다. 내가 연못이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물고기.


살아간다는 건 변해간다는 것. 삶에 적응하기 위해 무언가를 버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것마저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사람의 수순인 것 같아. 나는 동심에 쥐약이지만, 그건 내가 너무 많은 걸 버려버린 탓이다. 어른이, 그것도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었기에 버려버린 것. 허나 나는 어디까지 와있고, 장차 어디로 변해갈 것인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더 바칠 것이고, 무엇을 더 잃어버린 다음 뒤돌아 볼 것인가. 이젠 지켜나가야 할 때가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아랫배의 떨림을.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