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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나, 견고딕체로 말한다. 볼드까지 넣는다.

내 면상에 신경 꺼! 내 인상, 내 인성, 내 인생에 신경끄라고!

 

연극 <견고딕걸>은 범죄 이후 가해자의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사건 이후 책임을 질 가해자는 사라진 채 주변의 관심과 무게를 견뎌야하는 가족들.

 

<견고딕걸>의 주인공인 수민이는 살인사건의 가해자인 수빈이의 쌍둥이 언니다. 지하철에서 동급생을 철도로 밀어버리고 자살해버린 수빈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타인에게 상처를 준 뒤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동생에 대해 수민이는,  또 남겨진 가족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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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친절한 연극은


 

연극 <견고딕걸>은 내가 봤던 연극 중에 가장 친절한 연극이었다.

 

전 회차에 개방형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 일부 회차에 폐쇄형 음성 해설이 진행된다.

 

한글자막도 단순 스크린에 띄워주는 한글 자막이 아니라 대사의 분위기에 따라 자막의 위치와 크기 등 표현을 다르게 해 관객의 내용 이해도를 높였다. 더불어 그 스크린은 무대 배경으로도 쓰여 극의 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자막뿐만 아니라 몇몇 동영상을 넣어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다채롭게 구현해냈다.

 

공연 시작 직전에 가장 큰 소리, 가장 밝은 빛, 암전에 대해 배우가 안내했던 것도 인상깊었다. 소리나 빛에 민감한 사람들까지 섬세하게 배려하는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1000px견고딕-걸_풀샷3ⓒ김솔.jpg

 

 

 

연출은


 

<견고딕걸>은 전 장면이 모든 배우의 퇴장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며 전개된다. 이러한 진행방식은 자칫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켜 몰입을 방해할 수 있으나, 무대 위에서 환복을 하는 등 대기 구역에서의 움직임을 최소화함으로써 그 영향을 줄였다. 아울러 대기 구역의 조명을 최대한 어둡게 조절해 관객의 집중력을 더욱 높였다.

 

극은 최소한의 소품만으로 진행되었지만 무대가 허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배우는 나레이션과 움직임으로 무대를 채웠고, 그 움직임은 무거우면서도 간결했다. 덕분에 무대는 정적이면서도 밀도있게 느껴졌다.

 

또, '사라진 범죄자의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라는 무거운 주제때문이었을까? 주제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풀어내려는 연출진의 의도가 보였다. 대사에는 운율과 리듬이 더해져 마치 노래처럼 들렸고, 유머가 가미된 장면들도 많아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메세지를 전달하는 순간에는 분위기를 전환시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무겁게 던졌다.

 

<견고딕걸>이 공연된 두산아트센터는 주로 실험적이고 사유중심적인 작품을 주로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연을 보는 순간마다 왜 이 작품이 두산아트센터에서 올려지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small견고딕-걸_풀샷5ⓒ김솔.JPG

 

 

 

남겨진 가족들은


 

가족들은 사건에 대해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가해자의 가족으로서 지은이(피해자)의 가족에게 사과해야한다는 수민이. 수빈이에게는 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엄마.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건으로부터 도망치는 아빠.

 

수빈이의 엄마인 진희는 '리셋'이라는 책을 쓴 저자이자 유명한 강사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리셋! 네 새끼 때문에 죽은 아이나 초기화하라'

'리셋! 네 새끼나 네 뱃 속으로 초기화하라'

'리셋! 내 지갑이나 초기화하라'

 

'살인자의 엄마'라는 이름에 쏟아지는 화살들이 진희를 현실로부터 회피하게 만들었다. 수빈이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정의내리고 그 병의 잘못이지 내 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합리화한다. 그렇게 진희는 사건 자체를 부정하며 지은이의 가족에게 사과하러 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아빠인 우철은 본인이 좀 더 노력했어야한다고 자책한다.

 

우철은 자신과 두 딸을 두개의 알을 품고있는 펭귄으로 비유하고, 두 알 모두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더불어 아내와의 의견 마찰로 인한 갈등도 깊어지고, 죄책감만이 가득 든 맨홀에 빠진 상태로 집을 떠난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와이안풍의 가게를 열며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회피한 것이다.

 

이 세 명의 가족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수빈이를 그리워하지만 그리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견고딕걸>은 가면 뒤에 숨어 손가락질만 하는 대중들의 현실도 비판한다. 그립지만 그리워하지 못하는 양면성은 대중의 손가락질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유명한 강사인 진희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 수빈이와 쌍둥이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비슷한 살인자 취급을 받는 수민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아빠. 이들은 수빈이의 장례식장에서조차 슬퍼하지 못한다.

 

이후 엄마와 수민이는 수빈이에 대한 그리움을 서로에게 풀어낸다. 가해자 가족이 짊어져야하는 책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다.

 

수민이는 사과하는 길을 선택한다. 지은이의 각막을 가진 미나, 지은이의 심장을 가진 현지와 함께 말이다.

 

세상에게서 멀어져 어둡고 까맣고 딱딱한 견고딕이 된 수민이는 친구들 덕분에 내면의 색을 찾아간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쓴 노래를 부르고, 평소에 입던 색이 아닌 다른 색의 옷을 입기도 한다.  수민이만의 까만 '견고함'에 금이 가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는 방법을 배운다.

 

현지는 수민이를 스크래치북 같다고 말한다. 스크래치가 나면서 자신의 색을 드러내는 스크래치북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신의 색을 점점 드러내는 수민이가 기특하게 느껴졌다.

 

연극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지은이의 부모님이 수민이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수민이가 끝까지 잘 해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수민이는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돌아왔을 수도 있다.

 

나는 수민이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미소는 기스와 같다. 얼음장 같던 얼굴이 깨지게 되니까.'

 

수민이의 얼굴에 있던 미소를 기억하기 때문에, 얼음장 같던 수민이의 마음이 친구들 덕에 깨졌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나는 공연 마지막, 당당히 걸어가는 수민이의 모습을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

 

 

1000px견고딕-걸_1ⓒ김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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