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단어에 원어가 함께 기재되었습니다.
*본 기고문은 성적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이미지들은 작가들의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사진이나, 개인에 따라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음을 사전에 알려 드립니다.
서머 타임이 시작되고, 화창한 봄날씨가 다가온 런던에서 흥미로운 두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현대 미술을 조망하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개최한 리 보웨리(Leigh Bowery)의 전시 "Leigh Bowery!"
호주에서 태어나 1980년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 클럽 씬에서 뉴 로맨틱 운동*에 동참했던 패션 디자이너 보웨리와 영국 북부에서 태어나 1970년대 맨체스터 펑크 씬에서 활동하며 포토몽타주 작업을 이어 온 린더. 두 작가는 1970~1980년대 영국의 서브컬처 씬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아우르는 성적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보웨리가 활동했던 클럽을 연상시키는 조명과 린더가 자주 활용했던 꽃의 이미지를 타이틀에 부착한 전시 서문. 전시의 질을 높이는 디테일이었다. 출처: 직접 촬영
*1980년대 펑크 이후 런던에서 성행했던 서브컬처 장르다. 과장된 메이크업, 화려하면서도 중성적인 패션으로 기존의 성별 표현과 사회 규범에 도전했다.
젠더 수행성(Performativity)에 대한 도전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그녀의 저서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에서 젠더 수행성 개념(Gender performativity)**을 논의하며 여성 혹은 남성이 수행해야 하는 정해진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 몸짓, 말투, 스타일링이 여성, 남성 등의 정체성을 후천적으로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반복적 행위들은 개인들의 자율적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회 규범과 권력 구조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사회는 어떠한 행위는 인정하지만, 어떠한 행위는 제재, 비웃음, 배제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고정된 젠더를 형성한다. 이에 따라 남성, 여성, 혹은 그 외의 자신의 정체성을 표명한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고정된 성 역할의 강요를 경험하게 된다.
다만, 버틀러는 젠더가 반복적 행위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자들에 의해 규범에 벗어나는 다른 행위들이 반복된다면 젠더는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미술관에서 다른 기간 동안 진행되는 보웨리와 린더의 전시를 함께 소개하고자 하는 까닭은, 보웨리는 동성애자로서, 린더는 여성으로서 전통적인 사회가 규범적으로 정한 고정된 성 정체성, 젠더 수행성을 그들의 예술로 전복하려는 시도가 버틀러가 제시한 젠더의 변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보웨리와 린더, 두 작가의 미디엄과 정체성은 다르지만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신체가 지니는 내러티브와 서브 컬쳐 활동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젠더 수행성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젠더(Gender)를 ‘성’으로 번역하여 설명할 경우 생물학적 성인 ‘sex’와 성적 지향을 의미하는 ‘sexuality’와 의미가 중첩될 수 있기에 ‘젠더’라고 표기한다. ‘성 정체성’, ‘사회적 성’, ‘성 역할’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신체의 재해석- 보웨리의 퍼포먼스
보웨리에게 ‘몸’이란 모든 예술의 중심 도구이자 상상력의 원천이다. 분장에 가까운 두꺼운 메이크업, 여성복과 남성복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과감한 디자인의 드레스와 하이힐을 활용한 뉴 로맨틱 스타일. 길거리, 그가 설립한 클럽 Taboo, 패션쇼와 무용수의 무대 위에서 선보여진 그의 의상은 고정된 성 정체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이트클럽 Taboo에서 촬영된 보웨리의 메이크업, 1981-1986, 출처: 직접 촬영
보웨리는 패션을 미디엄으로 삼는 예술가로서, 안무가 마이클 클락(Michael Clark)과 협업하여 무대 의상을 제작했다. 보웨리의 의상을 입은 무대 위 남성들은 전통적인 사회가 규정한 ‘이성애자’로서의 '남성적’ 매력이 아닌, 안무가가 디자인한 몸짓과 그들의 신체가 지닌 그 자체의 미를 보여준다. 이는 남성의 신체가 지니는 미적 가능성을 넓혀 ‘남성성’의 정의를 확장한다.
마이클과 협업한 무대 작업 "Because We Must"
디자이너이자 행위예술가였던 보웨리에게 그의 신체는 그 자체로 그의 예술 세계를 구성하는 중심이 되었다. 특히, 그의 퍼포먼스는 대중들에게 때로 불쾌하게 다가올 수 있는 충격을 주며 선천적인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 역할’ 사이의 연결 고리를 붕괴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퍼포먼스는 보웨리가 그의 아내**** 니콜라와 함께 한 ‘출산 퍼포먼스(Birthing Performance)’다. 이 퍼포먼스에서 니콜라는 보웨리의 의상 속에 거꾸로 매달린 채 그것을 찢고 등장하며, 소시지를 탯줄처럼 몸에 휘감고 붉게 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보웨리가 출산을 하는 주체, 니콜라가 태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남성의 신체로 출산 행위를 재현하여 사회가 구성한 젠더의 개념에 도전한다.
출산 퍼포먼스(Birthing Performance), 1994, 출처: Courtesy Michael Hoppen Gallery
***결혼 전의 이름은 니콜라 베이트먼(Nicola Bateman)이다.
****보웨리는 명백히 그의 정체성을 동성애자로 규정한다. 그러한 그가 친구로서 깊은 관계를 맺었던 동료 디자이너 니콜라 베이트먼과 결혼한 것은 이 결혼 또한 그의 행위예술 중 일부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에이즈가 창궐하여 동성애가 범죄와 질병으로 여기던 당대 사회에서 리버풀 스트리트 역 화장실에서 동성과 성교를 했던 보웨리가 체포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물론 공중화장실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이 현 시대에도 매너는 아니지만, 당대에는 파출소 훈방 조치 정도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체의 재조합- 린더의 포토몽타주
무제, 1976, 출처: 직접 촬영
화면에 원피스 속옷을 입고 유혹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여성과 그녀의 팔을 대체하고 있는 청소기가 있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사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의 성 역할과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적 시선을 동시에 암시한다. 두 권력 구조 하에 형성된 ‘여성적’ 이미지들이 조합된 이질적인 화면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잡지, 로맨스 소설, 포르노 등 린더는 다양한 인쇄 매체에 등장하는 여성의 신체와 사물을 재조합하는 포토몽타주 작업을 이어왔다. 그녀는 이를 통해 사회가 강요하는 객체화되고 고정된 여성적 이미지에서 여성 고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탄생시킨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에서 여성 신체와 사물의 재조합은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여성을 향한 사회적, 구조적 폭력을 암시하는 내러티브 또한 내포하고 있다.
여성의 신체가 합성된 화면의 배경은 침실, 욕실, 주방 등으로 일상에서 언제나 향유하고 있는 공간들이다. 린더는 객체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이러한 배경들에 합성하여 여성을 향한 성적 억압은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린더의 작업은 후기로 가며 더욱 다채로워진다. 여성의 신체는 동식물과도 합성되며, 신화와 동화의 모티브를 그녀의 작업세계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사랑에 헌신적인 미형의 여성들은 린더에 의해 성적 시선이 담긴 여성의 신체와 동식물과 결합된 화면으로 표현된다. 가부장적 판타지가 신성화한 여성에 대한 기대는 허상이 되며, 해체된다.
중국의 고전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업 "Ye Xian"
린더의 포토몽타주는 그녀의 작업 세계에서 단순히 기법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형성한 ‘여성적’ 이미지는 린더의 손을 거쳐 오려지고, 해체되고 마침내 재조립되며 새로운 서사를 내포한다. 즉, 그녀의 포토몽타주는 여성에게 부여된 기존의 젠더 수행성에 저항하는 일종의 시각적 행위로, 그녀의 화면에 등장하는 객체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여성 중심 언어로 재해석되어 여성들에게 재전유된다.
서브컬처, 비주류가 지니는 저항성
보웨리와 린더는 모두 서브컬처 씬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보웨리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게이 클럽 Cha Cha Club에서 드랙 퀸 이벳(Yvette)을 만난 계기로 런던의 클럽 씬에 빠져들게 되며, 1985년 그 어떤 정체성도 표출할 수 있는 예술적 공간, 클럽 Taboo를 설립한다. Taboo에서 보웨리는 그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다양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그 공간에서 영감을 주고받았다.
클럽의 입장 원칙은 단 하나였다. ‘옷차림에 당신의 인생을 담을 것, 그렇지 않으면 오지 말 것’*****. 이는 옷이란 자신의 모든 정체성과 예술 세계를 담을 수 있다는 보웨리의 가치관이 담겨 있으며 Taboo가 단순히 클럽이 아닌 예술가들의 교류의 장으로 기능하게 한 원칙이었다.
린더는 1970년대 맨체스터에서 펑크 밴드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번 헤이워드 갤러리의 전시 "Danger Came Smiling"의
앨범 커버에 사용된 무제 이미지, 1976, 출처: 헤이워드 갤러리 공식 사이트
보웨리와 린더가 각각 속했던 클럽과 펑크는 당대 주류 문화에서 벗어나 서브컬처로 규정된 것들이었다. 해당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라이프스타일, 가치관, 외형 등 기존의 사회가 수립한 질서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일관된 상동성을 공유하여 지배 문화와 권력 구조에 저항한다. 가령, 펑크 문화에서 안전핀은 옷을 수선하는 일상적 도구에서 피어싱 액세서리로 변모해 위협적인 사물로서 저항의 상징이 된다.
관습으로부터 벗어난 문화적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해 온 보웨리와 린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기존의 사회적 틀에 대해 저항하는 서브 컬쳐 씬에서 발전시킨 그들의 가치관과 태도가 신체를 재해석하여 전통적인 젠더 수행성을 해체하는 예술적 행위로 이어지게 된 것이겠다.
*****원어는 ‘Dress as though your life depends on it, or don’t bother’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보웨리와 린더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지닌다. 여전히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기 위해 큰 용기가 필요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이들은 새로운 강요된 이미지에 직면하여 그들의 커뮤니티 밖으로 나오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린더의 작업에서 다뤄지는 성상품화된 나체에 합성된 사물은 동시대 딥페이크 영상과 라이브 방송을 통한 온라인 성매매 문제에 대해 동시대적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동시대에는 과거보다 다양한 정체성이 표출되고 있으며, 여성을 향한 성 고정관념도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드랙 표현이 기존의 여성성을 과장하고 소비하는 방식이라는 비판도 제기되며, 이로 인해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도 젠더 표현을 둘러싼 복잡한 긴장이 발생하기도 한다. 보웨리 역시 본문에서 소개하지 않은 그의 일부 퍼포먼스에 대해 동료들로부터 여성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피드백을 받아 중단******한 바 있다. 다양한 집단 간의 지속적인 소통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클럽과 펑크에 대한 영국과 한국의 문화적 인식은 다르지만, 두 작가가 참여한 서브컬처 씬에서의 활동이 지닌 저항적 내러티브는 오늘날 그것들을 향유하는 이들을 보다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2022년, 이태원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로 현장에서 약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내 동년배의 청년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방문한 장소에서 그런 참사를 겪었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사건의 주 원인은 예년과 비교해 해당 구역의 인파 관리를 위한 행정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음에도, 일부 언론이나 커뮤니티는 희생자들이 '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에 대한 추모가 과도하다는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는 버틀러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클럽 문화는 문란하다'라는 사회의 인식이 당시 이태원에 있던 희생자들에게 일종의 '수행성'을 부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약 300명의 사상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본 기고문은 해당 사건을 정치적 담론으로 확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서브컬처를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모두가 클럽 문화를 즐기고 좋아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짓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 역할, 소수자성, 서브 컬처 등에 사회가 부여한 고정관념이 이태원 참사같은 사회적 사건에 대해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에는 경각심을 환기하고자 한다.
'사실'과 '인식'을 구별하고 다양한 개인들을 포용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소수자적 정체성이든, 남들과는 다른 여성성과 남성성의 규정이든, 그것들을 배제하고 조롱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만든다. 고립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당성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들만의 수행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새로운 편견과 규범화를 재생산할 가능성도 있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은 젠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수행성이란 새로운 행위가 반복됨으로서 전복될 수 있다'는 그녀의 암시는 보다 광범위한 편견과 혐오가 개인과 사회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각자의 정체성과 선호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기반을 마련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보웨리의 활동 전반이 여성혐오적이었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