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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성수의 작은 공간에 자리한 전시장 '맷멀'. 이곳의 하얀 벽에는 5인의 작가들이 틔워낸 세상이 있다. Mia(이서연), 나른(장의신), 대성(정주희), 유사사(오예찬), 은유(박가은). 틔워낸다는 것은 표면을 깨고 나온다는 것. 메말라 있던 땅이든 단단한 껍질이든 그것을 뚫고 난 뒤에야 내면의 세상을 꺼내 보일 수 있다. 아트인사이트 제1회 기획전 '틔움'에서 마주한 작가들의 세상은 연인과의 비밀스러운 시간만큼이나 내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만큼이나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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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 화려함 속 숨겨진 아이러니


 

<틔움>에 전시된 대성 작가의 전시품은 크게 세 가지 섹션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욕망', '탐욕' 등이 포함된 카툰 스타일의 선화, '당신이 바라던 모습대로', '표적' 등의 작품이 포함된 장미 시리즈,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 토끼 시리즈. 풍자적 상상력이 가득 담긴 선화는 그 우스꽝스러움에 첫눈에 피식, 웃게 되지만 다시 살펴보면 그 속의 찜찜함을 발견할 수 있다. 수도꼭지에 제 입을 대고 끝없이 물을 마시는 풍선을 그린 '탐욕'처럼 말이다.


 

"저기, 터질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네 조금만, 조금만 더요!"


욕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심 없이는 살 수는 없지만, 욕심은 종종 우리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져 결국 탈이 나지요. 내가 바라는 그것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대성, <탐욕>

 

 

이어 오른쪽에 배치된 장미 시리즈는 대성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녹여낸 작품이다. 방 속에서 키워지고, 액자 속에서 관람의 대상이 된 장미. 장미는 마지막 작품 '진짜, 나의 꿈'에서 드디어 많은 꽃이 있는 야외로 나가게 된다. 꿈이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 또한 장미의 꿈일 뿐일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어두운 작품의 톤에서 또 한 발짝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아마도 이 전시에서 가장 고명도의 작품이자 대성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 나오는 하얀 토끼 시리즈를 만날 수 있다.

 

 

대성_존재의 근원.jpg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별개의 작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른 독특한 화풍을 지닌다. 특히 토끼 시리즈는 이전의 작품들과 스타일적으로 극명한 대비를 보이는데, 이 변화를 대성 작가는 본인 내면의 변화라고 설명한다. 장미 시리즈로 한차례 내면을 틔워낸 후에 환기가 된 것일까. 그럼에도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아이러니한 정서는 변치 않는다. 단순해 보이는 그림들에 대성 작가는 슬픔을 반짝임 속에, 탐욕을 농담 속에 숨겨놓는다. 그러니 그 얇은 포장지 너머를 보는 관람객들은 모순을 느낄 수밖에.

 

 

 

은유, 은하수를 유영하는 별


 

은유 작가는 스스로의 소개가 가장 적합한 작가다. '은하수를 유영하는 별.' 함축적인 작가명처럼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은유'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한 흔적들이 보이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본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별바라기' 시리즈. 은유 작가의 10대 시절을 사막이라는 공간에서 재현한 연작이다.

 

 

은유_아무도 모르는 곳으로.JPG

 

 

별바라기 연작은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는 작품으로 시작한다. 빛의 반대 방향으로 무력하게 가라앉는 인물. 그는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항할 생각조차 없이 끝없이 내려앉는다. 은유 작가의 세상에서 물은 주인공의, 혹은 과거 작가의 눈물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그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은 끝없는 눈물의 바다를 지나 눈물이 증발한 사막에 도달한다. 세계관. 별바라기 연작은 '세계관'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어지는 장면 속 반복된 객체들이 각자의 의미를 갖는다. 가시, 꽃, 물, 햇빛, 그리고 진주.

 

 

'멈췄던 사막이 다시 흐르고 있는 걸까?'

나의 물음에 내리쬐는 태양이 빛으로 답했다. 가만히 햇빛을 담고 있던 꽃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비로소 내일에 닿을 때 너의 세상에 해가 질 거야."

꽃과 그림자의 틈 사이로 작은 일렁임이 일었다.

 

- 은유, <꽃 한 송이>

 

 

하지만 이 객체들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해석된다. 햇빛보다는 어둠이 긍정적이고, 해가 지지 않는 백야는 극복되어야 할 시간으로 설정된다. 마치 잘 짜인 책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다. 주인공은 과연 별바라기의 끝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있을지. 진주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니, 그 전개가 궁금해진다.

 

 

 

유사사, 펜화로 그려내는 내면


 

은유 작가의 세상이 바다와 사막이라면 유사사 작가가 틔워낸 세상은 정원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유사사 작가의 연작은 크게 두 가지.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와 '어슴푸레한 눈맞춤'이다. 전자는 우울감을 가진 내면을 하나의 정원에 비유하고, 후자에서는 그 마음속에 열쇠 구멍을 열고 들어가 적극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탐구한다.

 

 

기묘하게도 그믐달은 정원 한가운데에 고여있는 호수 위에서만 제 궤도를 그렸다. 호수가 그믐달을 제 품에 가둔 건지, 그믐달이 호수에게 시선을 빼앗긴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호수를 무대 삼은 그믐달의 왈츠. 총총히 눈을 깜빡이는 빛무리가 그 몸짓의 선율이 되어 주었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숨죽여 그 공연을 목도하였다. 영원한 관객과 영원한 무용수. 이 세계를 존재케 한 시간을 짓는 우아한 몸짓. 끝없이 시연되는 새벽. 우울의 잠긴 정원은 아름다웠다.

 

유사사, <그믐달의 왈츠>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는 열 편의 글과 그림을 담은 독립출판물로도 나와 있는 작품이다. 단편집이라기보다는 꿈 기록집이라는 은유 작가의 설명처럼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매혹적인 그림들로 가득하다. 그림은 글을 만나 더욱 그 매력이 극대화되는데, 꿈속에서 본 장면을 깬 이후에 하나씩 이름 붙이듯 그림은 하나의 장면으로 박제되어 있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둘이 만날 때 흑백으로 정지된 그믐달은 왈츠를 춘다.

 

 

유사사_선잠.jpg

 

 

'어슴푸레한 눈맞춤' 연작 중 작가 본인이 가장 아끼는 그림이기도 한 '선잠'이라는 작품이다. 두 개의 층위로 나뉜 이 작품은 반짝이는 위쪽과 그 뿌리 같은 아래쪽으로 나뉘며 중간의 구름은 꿈 자체를 형상화한 듯하다. 이 외에도 응망, 온기, 적요, 습기 등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들을 세밀하게 표현한 펜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꿈결같이 불명확하고 어딘가 두루뭉술한 소재를 시각화해 낸 것도 제목을 보면 일견 납득이 되는 것도 놀랍다. 작품들 위에는 반투명한 종이를 붙여 그 모호함을 극대화하는 중이라고. 더 불명확해지고 더 관념적인 개념들로 향해가며 유사사의 작품은 언젠가는 무에 닿을 것도 같다.

 

전시장에서 대성, 은유, 그리고 유사사 작가의 작품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작품에 대한 설명임과 동시에 그들이 각자 거쳐왔던 감정, 대개는 부정적인 감정들, 에 대한 고해였다. 그 무형의 감각을 쏟아내기 위한 관조와 인내의 시간을 거친 뒤에야 작가는 하나의 세상을 틔워낸다. 그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필자의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움트기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굿즈샵을 들러 그들이 틔워낸 세상을 조금 집으로 가져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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