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E.M. 포스터가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모리스’가 지난달 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막을 올렸다. ‘모리스’의 이야기가 뮤지컬로 재구성된 것이 세계 최초인만큼 작품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완성되었다. 비교적 짧은 10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휘몰아치는 인물들의 감정을 상징과 은유로 센스 있게 표현하여 몰입감을 더했다.
‘모리스’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보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반쪽을 찾아 얽히고 설키는 세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훨씬 더 다면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다. 작품은 ‘정상과 비정상’을 판별하는 사회적 기준이 개인 본연의 욕구와 정체성을 억제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진정한 ‘자유’란 허상에 불과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반문한다.
안정과 자유 사이, 문고리를 당길 용기
모리스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보수적인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대학 시절 자신의 반쪽이라 여기며 사랑하던 클라이브의 결혼 소식을 접한 모리스의 황망한 표정으로부터 작품은 포문을 연다. 자신을 찾아온 모리스에게 정신과 의사는 지금의 ‘비정상’ 상황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을 극대화하여 ‘정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의사의 인도 하에 모리스는 거대한 문 앞에 선다. 그는 자꾸만 벌어지려는 문 틈새를, 그 사이로 비쳐 드는 빛을 뒤로 한 채 문을 닫고 안정적인 집 안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한 때 모리스는 클라이브와 함께라면 불안정할지라도 반짝이는 문 밖의 세상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굳게 문을 닫고 장롱 안에 자신의 내면을 꽁꽁 감춰 버리는 길을 택했다. 어린 아이처럼 몸을 한껏 구긴 채 마치 그곳이 태초의 자궁속이라도 되는 듯 숨어버린 그의 모습은 ‘정상’이라는 잣대를 든 채 검열과 감시를 거두지 않는 사회적 시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부족함 없는 안정적인 삶이지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감추어야만 하는 문 안의 세상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반쪽과 함께 나아가고자 했던 모리스의 기대는 좌절되었고, 그 역시 ‘정상적인 결혼’을 했다는 클라이브처럼 이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의 범주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던 중, 클라이브 저택에서 일하는 알렉의 정중한 노크소리가 또 한번 모리스의 문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자유를 찾아 떠난 개는 절대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알렉은 그 어떤 사회적 규범과 제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모르는 새 열리고 마는 문틈으로 들어오려는 알렉을 마치 클라이브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문 밖으로 밀어내 보려 하지만, 모리스는 결국 알렉으로 인해 깊은 내면 속에 묻혔던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작중 후반 그토록 두려워했던 문고리를 열고 나가 알렉의 곁에 서기로 한 모리스의 결정이 유독 인상 깊었다. 원한다면 그는 자신이 머무르는 안전한 집 안으로 알렉을 묶어 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문 안의 보장된 삶을 잃을 각오로 그가 문을 활짝 연 것은, 자유를 추구하기에 아름다운 알렉의 모습에서 그가 찾던 행복의 실마리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문 안의 삶을 택한 클라이브의 극 중 마지막 모습도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모리스와의 추억을 상징하는 악보 연주를 틀어둔 채 쓰디쓴 약을 삼키고, 문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도 문 안의 환경이 그를 붙잡기에 굳게 문을 닫고 마는 그의 모습은 매몰차기보다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삼삼해서 세련된 연출이 주는 깊이있는 몰입감
뮤지컬 모리스의 무대는 두 개의 커다란 문, 위압감을 드러내는 장롱과 반투명한 커튼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목을 끄는 화려한 장치나 프레임은 없지만 작품은 작중 메시지를 잘 투영하고 있는 이 심플한 구성으로 100분 간의 러닝타임을 잔잔하지만 깊이감 있게 이끌고 간다.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과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문을 여닫는 행동으로 가시화된다. 무대 위 가장 눈에 띄는 이 문은 때로 희망차고 따스한 빛을 들여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육중한 성벽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희망과 절망의 기로에 선 인물들의 감정 변화와 선택의 결과를 몰입감 있게 표현해준다.
무대 구역을 반으로 가르는 커튼의 활용도 또한 눈에 띄었다. 커튼을 쳐 구분된 각 공간의 조도와 연출을 반전시켜 인물들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일순간 걷어낸 커튼 뒤로 새로운 장소의 배경이 등장하며 막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인물들의 기본 의상에 무릎 보호대를 더해 스포츠 상황을 연출하거나, 그리 넓지 않은 무대 세트를 벗어나 객석 계단을 이동 동선으로 활용하는 등, 일관된 톤의 구성을 헤치지 않는 센스 있는 소품 활용이나 무대 표현 또한 극의 몰입을 돕는 확실한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