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뮤지컬의 매력을 잘 느끼지 못했다.
대체로 뻔하고 억지스럽다는 인상이 있었다. 아마 내가 뮤지컬에서 기대했던 건,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과 이야기 전개였을 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판소리가 주제인 뮤지컬을 보게 된 계기로 이어졌다.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인 판소리 뮤지컬 <적벽>을 본 뒤 내 인식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놉시스: 3세기 한나라 말엽, 위·한·오나라가 부패와 혼란의 정세 속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368년경 발간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500여년 후 그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불렸던 판소리 '적벽가'를 원전으로 현대적 감각을 더해 무대화된 작품이다.
나는 처음으로 역사적 사건을 각색한 뮤지컬을 보았고, 이런 형식과 표현은 오히려 더 매력적이게 다가왔다. 특히 전통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다소 무겁고 정적인 이미지가 이번 공연을 통해 바뀌었다.
'전통'이 단지 옛것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풀어내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유연한 감각이라는 것을, 고전은 낡은 것이 아닌 새로운 감동과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담길을 따라 국립정동극장에 도착하는 길은 공연을 향한 기대감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렸다.
객석에는 대학생부터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있었다. 특히 놀랐던 점은 재관람 관객층이 대체로 중장년층이었다는 점이다. 보통 뮤지컬은 젊은 세대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공연은 전통있는 이야기와 판소리 라는 요소 덕분인지 더 넓은 세대의 공감을 얻고 있는 듯했다.
무대는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적벽>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깔끔하면서도 강렬한 조명, 라이브 밴드로 구성된 음악, 그리고 안무와 연기가 어우러져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음악, 음향적으로 놀라운 구성이었다. 나는 처음에 판소리를 단순 재생하거나 1인 창으로만 표현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전통적인 판소리 악기들에 더해 타악으로 드럼을 사용해 무대 위의 에너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이 음악 속에서 몰입할 수 있도록 균형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그에 어울리는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의상이었다.
장면마다 감정의 완급 조절이 잘 이뤄졌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무대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마냥 무겁고 진지하지만은 않았고,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감탄을 자아내며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처음 뮤지컬을 억지스럽다고 느꼈던 이유는 감정의 흐름이 납득되지 않거나 과장된 느낌 때문이었는데, <적벽>은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을 되살려주었다.
또한 이 작품은 젠더프리 캐스트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인물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판소리 특유의 보편성과 연결되며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각자의 결의와 의리, 그리고 힘이 맞부딪히는 100여 분간의 적벽은, 공연 내내 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이 공연에서 '전통을 재해석하는 힘'을 강조하고 싶다.
익숙하고 오래된 이야기가 이렇게 현대적인 무대에서 새로운 감동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것과 전통예술이 결코 고루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특히 뮤지컬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입문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적벽>을 보고 난 뒤 전통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비추는 살아있는 감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불의 소리와 바람의 춤으로 적벽으로 떠나는 이 공연은 2025년 3월 13일부터 4월 20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전통’과 ‘뮤지컬’을 소개하고 싶다면, 이 공연을 꼭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