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점점 길어진다. 매서운 추위 때문인지 모를 유난히 뒤숭숭하던 겨울을 지나 새해를 정신없이 맞이했다. 작년의 묵은 추위, 이제는 조금 가시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비웃듯 올 3월에는 앙큼스러운 눈발이 날렸다. 새봄의 설렘도 아직은 사람들의 두꺼운 옷 속에 꽁꽁 숨겨진 느낌이다.
이토록 애매한 봄이기에 올해의 경칩(驚蟄)이 유난히 기다려졌을지도 모르겠다. 선조들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음을 증명하듯 지난 5일을 기점으로 서울의 날씨는 영상을 웃돌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옷 껍데기도 한 꺼풀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경칩(驚蟄),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도 깨어날 만큼 완연한 봄의 기운을 가져온다는 날.
하물며 개구리도 깨어난다는데, 오늘만은 이 귀한 봄기운을 누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닫혀 있던 창문을 열고 소소하게 책장 위 뽀얀 먼지라도 털어볼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 손 걸레로 구석구석 먼지를 걷어내던 중, 지난 겨울 우연히 들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구매하고 반 정도 읽다 멈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끼워 두었던 책갈피가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하는 듯 애처롭게 나와있는 것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개구리가 되고 싶어’
솔솔 불어보는 봄바람에 취하듯, 형광 초록빛의 책 표지에 작게 그려진 개구리가 “오늘 같은 날 이 책을 마저 읽으면 좋지 않겠어?” 하고 말을 거는 듯했다.
그렇게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에, 다시 책을 펼쳤다.
크로와상 권태
이 소설은 가은의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은의 권태감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권태감이다. 어떠한 기대감과 즐거움도 없이 일과 삶의 권태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상이 가은에게는 너무나도 지긋지긋하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내가 곧 가은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말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권태에 빠져 시들해 있던 내 모습이 가은과 닮아 있었다. 특히 가은이 정의하는 권태감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권태감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가은의 권태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
나쁜 점은 무엇에도 설레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좋은 점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는 것.
나쁜 점은 내게 만족스러운 일이 거의 없다는 것. 좋은 점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복달하지 않는다는 것.
나쁜 점은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져서 벅찰 일도 없다는 것.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린 권태감.
마치 크로와상처럼 겹겹이 쌓여 기저에서부터 은은한 분노를 자아내는 권태감.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속이 물컹하게 무너질 것 같은 권태감.
가은의 권태를 크로와상으로 묘사한 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속이 후련해졌다. 여태껏 머릿속을 맴돌며 명확히 붙잡히지 않던 감정이 형태를 갖춰가는 듯했다.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았는데도, 일상의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권태의 크로와상을 형성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 속의 크로와상은 어떤 맛을 띠고 있을까? 혹은 나는 이미 거대한 크로와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내면의 크로와상을 눌러보며 생각에 잠겨본다.
즐거움의 신, 수경
그런 가은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즐거움의 신’이라 불리는 수경. 그녀는 가은에게 유일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존재다.
가은은 수경이 가진 가벼움과 활력을 동경하고, 때때로 수경처럼 행동해보려 한다. 홀로 강릉으로 떠나보지만, 수경처럼 즐거워지지 못하고 결국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자신과는 다르게 가볍고 자유로워 보이는 수경을 바라보며, 가은은 알 수 없는 분노와 질투를 느낀다.
그런 가은에게 수경은 한마디를 건넨다.
“가은, 다른 사람을 좀 좋아해봐.”
그 순간, 수경의 말이 책 속에서 튀어나와 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가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수경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수경처럼 사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로지 자신의 상태를 견디기에 급급해, 크로와상 같은 권태의 부스러기만을 주워 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나의 권태감이 결국 자신에 대한 오만함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어떤 것에 호기심을 가지려는 시도를 유치하다고 치부해버리면서, 어떻게 내 일상 속에서 즐거움이 자랄 수 있겠는가. 가은이 수경을 동경하면서도 질투했던 것처럼, 나도 열정을 가지고 어떤 일에 몰두하는 친구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책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읽고 떠오른 질문을 모아놓은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adhd.magazine)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정말로 그 사람의 능력일까, 아니면 노력일까?”
크로와상처럼 겹겹이 쌓인 분노가 나를 감싸고 있을 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밝음을 타고난 이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내가 그 밝음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삐뚠 마음으로 그 사랑까지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수경의 질문이 나에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열렬한 노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수경이 가은보다 먼저 그녀의 슬픔을 알아채고, 그녀만을 위한 작은 즐거움을 만들어 주는 모습은 너무도 귀하고 특별하다. 그리고 가은이 자신이 고인 물이 가득 찬 우물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고, 이제는 우물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고 인정한 순간부터, 그녀를 감싸던 크로와상의 껍데기들은 한 겹씩 벗겨지기 시작할 것이다.
언젠가 가은이 수경의 우물로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디는 날이 오길, 그리고 또 다른 즐거움을 발명해나가는 멋진 개구리가 되길 조용히 응원해본다.
자, 어찌되었든 새로운 봄이다.
절기 상 개구리는 깨어났고, 깨어나야만 한다. 내 안의 개구리도 우물 밖으로 힘차게 뛰어나가 싱그러운 풀 내음을 맡을 수 있기를. 코끝에 내려앉은 꽃잎 한 장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봄을 맞이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남기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다가올 봄,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