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 리미널 >이 리움미술관에서 개최했다.
전시 제목인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가 제시한 실재 세계에서 불가능하거나 상상을 넘는 그 이상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탐구가 이 전시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경계에 선 공간, 리미널한 상태
< Liminal >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리미널(Liminal)’은 본래 인류학에서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 즉 기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도 뚜렷한 정체성을 갖지 않은 불확실한 상태를 뜻한다. 피에르 위그는 이 개념을 확장하여,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던 실재의 개념 자체를 뒤흔든다.
그의 작품 속 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물리적인 세계와 디지털 세계, 인간과 비인간, 과거와 미래,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전시의 공간은 단순한 작품들이 배치된 곳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둘러싼다. 작품들은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며, 그 속에서 경험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낯선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서사
< Human Mask >
전시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존재들이다. 얼굴이 텅 빈 나체 형상의 여인이 움직이는 < Liminal >, 재앙으로 인해 인간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일본의 한 마을에서 소녀 가면을 쓴 원숭이가 등장하는 < Human Mask >, 물속에 있는 듯 정지한 시간 속에서 떠 있는 돌을 담은 < Precambrian Explosion 16 >. 각각의 작품들은 익숙한 현실을 조금씩 비틀어 새로운 감각을 열어놓는다.
특히 < Human Mask >에서 소녀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원숭이는 인간의 흔적을 뒤집어쓴 채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모방인지, 인간이 남긴 유산 속에서 살아남은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가면을 쓴 원숭이가 남겨졌을 때, 그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 되는가? 그를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인간의 껍질을 쓴 또 다른 존재로 보아야 할까?
피에르 위그의 작품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의 작업에서 모든 것은 경계에 놓여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모호함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불안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세계
< Precambrian Explosion 16 >
전시 속 공간에서는 시간 또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하며, 익숙한 이야기 구조가 아닌 그 바깥의 무언가를 탐색하게 된다. < Precambrian Explosion 16 >에서 보이는 정지된 듯한 돌은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마치 시간이 완전히 멈춰버린 듯한 감각. 그 돌은 지구의 태고적 순간을 담고 있을 수도, 혹은 현재 우기가 알 수 없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존재일 수도 있다.
피에르 위그는 “이야기의 형태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 역사를 넘어선 서사 밖의 허구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익숙한 방식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이야기를 기대하지만, 그 기대는 무너지면서도 미묘하게 빠져드는 중독성을 느꼈다.
현실 속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우리가 간과했던 존재들을 조명한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비인간’이라 부르던 존재들과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존재하는 것들, 인간이 만들어놓았지만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인간의 언어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전시의 주인공이 된다. 그것들은 인간의 흔적을 따라가기도 하고,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간이 정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공존을 상상하게 된다.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은 어떤 모습일까?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익숙한 것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시 < 리미널 >은 불안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익숙한 것들이 무너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 열린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우리는 혼란을 느끼지만, 그 혼란 속에서 묘한 매혹이 피어오른다.
그것이 바로, '리미널'이 선사하는 감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