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

 

“꿈이 뭔가요?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요?” 묻는 말이 대학생 때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면, 취업할 나이가 되고 나니 “일하시나요? 무슨 일 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더 많이 듣고 어렵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해부터 가만히 시간이 흐르는 걸 구경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내 인생에 부끄러움은 없지만, 같은 경험을 했던 친구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괜히 침울해진다. 


2023년에 처음 알게 된 뮤지컬 ‘해밀턴’을 좋아한다. 2016년에 토니상에서 11관왕을 차지할 만큼 명작이라 살면서 한 번은 꼭 무대에서 보고 싶은 작품이다. 명곡들이 많지만, 요즘에도 가장 자주 찾아 듣는 곡은 ‘The Schuyler Sisters’다. 특히 일과 관련해서 배우들이 “Work, Work”와 안젤리카의 “I’m lookin’ for a mind at work”를 들으면 취업 준비에 지친 내 영혼이 번쩍 깨어나는 듯하다. Work, work!를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명확히 모르겠지만 나에게만큼은 “일해라, 일해!”로 들린다.

 

 

Work, work!

Schuyler sisters!

Angelica! Peggy! Eliza!

Work!


Eliza, I'm lookin' for a mind at work

I'm lookin' for a mind at work

I'm lookin' for a mind at work


뮤지컬 <해밀턴> 중에서 ‘The Schuyler Sisters’

 


심지어는 언어 공부를 하면서 새로 배우는 표현에도 그렇다. 2023년에 미국으로 출국 전 미리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언어 학습 앱 ‘듀오링고’를 시작했는데 기대보다 더 만족스러운 내용 구성에 현재까지도 500일이 넘게 매일 이어오고 있다. 각 나라 언어마다 처음 배우는 단어가 카페 음료나 가족 호칭, 음식처럼 공통적인 부분도 있지만, 일본어와 베트남어에서 다른 나라 이름을 배울 때 스페인어에서 옷 쇼핑하는 단어를 배우는 것처럼 차이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


재밌게 느껴진 부분은 많은 나라에서 ‘Talk about work’, 즉 하는 일에 관해서 묻고 답하는 표현을 빠른 순서로 배운다는 사실이다. 요즘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독일어와 베트남어에서는 “Was ist dein Beruf?”와 “Chị làm nghề gì?”로 물어본다. 듀오링고에서는 한국어로 배울 수 있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언어 학습 인터페이스가 영어이기에 “What is your profession?” 한국인에게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What do you do for a living?”을 계속 듣고 보게 된다. 


무슨 언어를 배우면서도 백수의 설움을 느낄까 싶기도 한데, 교사, 변호사, 의사, 역무원, 조종사 등의 직업을 각 나라가 어떻게 표기하고 발음하는지 듣고 따라 하고 글자로 쓰다 보면 여전히 Studentin(독일어), Học sinh(베트남어)에 머물러 있는 스스로가 아쉽게 느껴진다. 


 

2. 

 

사실 설움보다는 일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에 더 가깝다. 자신의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자신이 일하는 분야와 공간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생애 첫 심야 영화로 보고 집으로 돌아온 새벽, 과학과 수학에 해박한 지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주인공들에게 반해서 잠들지 못하고 미래를 그리며 공부를 한 기억이 있다.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면서는 기타 공방으로 출근하는 박신혜가 연기한 인물을 보며, 언젠가 나를 찾는 사람이 언제든 나를 찾을 수 있는 집이 아닌 일하는 공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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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은 늦은 시간까지 퇴근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 들었다. 그 당시 나름의 문화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좋은 모습만 인식하고 내 할 일인 공부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열심히 사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많다는 사실을 어리지만 깨닫는 경험이었다.


어쩌면 그때 문득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나의 인생이 순탄한 탄탄대로는 아닐 수 있겠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대학 신입생이 되어도 대학생과 20대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그저 또다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석적인 일하는 준비였는지는 모르겠다.

 

 

I was walking down the road

길을 걷고 있었지

Thinking I know where I'm headed to

어디로 가는지 안다고 생각했어

Confidence overload

자신감이 넘쳤고

Believing I was ready to say

말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지


I know what I want

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I'll get what I want

난 내가 원하는 걸 가질 거라고


Walking Down The Road (2021) - 스텔라장

 

 

학습 의욕도 있지만 머리만큼 몸으로 직접 참여하며 세상을 배우는 시간이 많았다. 행사 기획, 홍보와 아트인사이트 글 기고처럼 머리를 쓰는 경험도 있었지만, 영상을 촬영하고 영화를 만들고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며 판매 경험을 쌓는 등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좋아하고, 문화예술 속 많은 인물에게 마음을 주기 쉽다. 그들은 머리로든, 몸으로든 무슨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재개봉해서 극장에서 본 영화 <더 폴>에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미로 특히 유명한데 나에게 좋은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시작과 끝에 나오는 스턴트 배우에 관한 장면이다. 

 

사실 시작은 음악(베토벤 교향곡 제7번 A장조 작품 번호 92, 2악장 Allegretto)에 가히 압도되어 집에 돌아와 유튜브 클립으로 다시 감상했다. 영화 음악으로 많은 감독들에게 즐겨 쓰인 명곡인데 나에게는 <더 폴>의 배경 음악으로 앞으로 몇 년간은 기억될 것이다.

 

시작은 영화 촬영 상황을 슬로우로 담은 장면이고, 끝은 영화 주인공인 ‘로이’의 일인 스턴트 장면의 몽타주이다. 일상적이지 않은, 특수한 육체적 스킬이 필요한 스턴트 특성상 촬영 중에 정말 다칠지도 모르는 조마조마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영화의 또 다른 어린 주인공 ‘알렉산드리아’의 시선에서는 자신이 병원에서 친해진 ‘로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일의 어려움과 고단함보다는 아름다움이 그려진다. 나에게도 그렇다. 

 


3. 

 

작년 하반기 신입 공채에 나의 오랜 친구가 합격해서 올해 직장인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만났다. 좋은 회사에서 필요한 직무로 일하고 있는 친구이기에 어떤 멋진 신입 생활을 보내고 있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생각지 못한 말을 듣고 놀랐다. 사람들이 다 아는 좋은 회사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고 일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지만, 가끔 취업을 준비하던 시간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의아했다. 입시만을 생각하던 고등학생 때 대학생을 만나면 대학에 와서도 힘들다는 말은 해도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과제와 팀 프로젝트와 시험은 어렵지만, 빛나는 미래에 조금 가까워진 대학생은 고생 끝에 얻은 편안함이 엿보이는 존재였다. 그런데 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취업 시장에서 성공한 내 친구는 취업 준비 시절을 그리워할까?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때는 힘들어도 미래가 무지갯빛이었는데 지금은 회색빛이야.”

 

 

빛나라 너의 이름 너의 내일 너의 꿈꾸던 날

빛나라 너의 생각 너의 젊음 너의 사랑까지

빛나라 너의 미소 너의 눈빛 너의 노래 너의 눈물까지

빛나라 너의 실패 너의 서툰 처음들 모든 걸 바쳐서


Shine (2022) - 페퍼톤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웃으면서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안아줬다.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못한 현실이 힘들지만,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은 만큼 일하는 준비를 하는 나의 현재도 어쩌면 빛나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날 계획에 없던 위로를 받았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세상이 알아보는 때, 기회가 주어지는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올 때까지 나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먼저 나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나를 사랑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다가 세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건강, 성실,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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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건강이다. 이때 나는 몸의 건강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 모두 지키는 것을 지향한다. 밥을 거르지 않고 잘 먹여야 한다. 우선 무언가를 먹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만 가능하다면 영양적인 식재료를 선별하면 더 좋다. 특히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에 신경 써야 한다. 나만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간단하게 대충 섭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또 매일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통해 나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를 깨우는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 건강한 몸에는 건강한 마음이 뒤따른다. 매일 잠들기 전에 짧게라도 하루를 되돌아보는 일기 혹은 다이어리를 쓰는 것은 그 마음을 기록하여 미래의 내가 함께 사랑할 기회를 제공한다. 


두 번째는 성실함이다. 규칙적이고 미루지 않는 성실한 태도는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가지면 좋은 모습인 것과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유익하다. 변화무쌍하고 척박한 세상 속에서 예외 없이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잠깐의 결심으로 이어가기 어렵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할 수 있다면 편안하고 쉬는 방식을 택하는 욕구가 있다. 이것은 단단한 유리창도 시간이 지나면 아래가 두꺼워지는 것과 당연한 이치이다. 그 기본적인 욕구를 깨트리고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본능을 이겨낸 성취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보상이다. 핵심은 나에게 가장 적절한 보상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보상도 좋다. 정말 사고 싶었던 것 큰마음 먹고 스스로에게 선물하기, 한 달에 하루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보내기 등 다른 사람들이 검증한 좋은 옵션들이 많다. 그것들을 해도 좋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크게 적용되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 


말하자면 개인 맞춤형 선물인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정리’다. 물리적 정리보다는 생각 정리와 데이터 정리가 나를 즐겁게 한다. 이것을 깨달은 건 올해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어느 날 마침 주문한 USB가 배송 왔고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내가 노트북에 쌓아두었던 사진과 영상들을 정리했다.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발휘되지 않았던 엄청난 집중력이 발휘되는 것을 발견하고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안녕하신가요

요즘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네요

오늘 하루는 어땠어

우린 더 잘될 거야

바빠도 건강해야 돼

차가운 온도계를 꺼내

서로를 살피며


서로는 서로가 (2016) - 위아더나잇

 

 

일하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3월 채용 지원서를 쓰다가 멍하니 창밖을 보니 평온해 보이는 빌딩들 아래에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의 내가 포기하지 않고 현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고 싶은 만큼 그들도 지치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오늘도 아침 일찍 눈 떠서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축복한다. 


뻔한 말이지만 글을 읽고 있는 학생, 직장인, 수험생, 취업을 준비 중인 당신의 지금 어려움은 곧 지나간다. 걷다 보니 마주한 터널에는 끝이 있으며 들어오기 전보다 더 비옥한 평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멈추지 말자. 천천히 계속 걸어가자. 쓰러지면 서로 힘을 모으자. 그렇게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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