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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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행위이지만, 책을 주제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독서라는 행위에 다른 차원의 깊이감을 선사한다. 혼자서는 생각치도 못한 색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고, 나와는 다른 취향을 접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내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다 보면 새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지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독서 모임은 단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자리를 넘어서 내 생각을 펼치고 확립할 기회를 갖게 되는 자리다.

 

처음 아트인사이트에서 가졌던 독서 모임에서의 경험이 좋아서 두 번째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엘리오 비토리니의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와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을 함께 읽었다. (사정상 두 번째 모임에는 참여하지 못해서 두 번밖에 함께 할 수 없었다.)

 

독서 모임의 수많은 기능 중 하나는 혼자라면 절대 끝까지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어떻게든 읽게 된다는 점이다. 두 책 모두 나 혼자서는 아예 시작하지 않거나 시작했더라도 중간에 그만뒀을 것 같은 책이었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했고, 내게 익숙하지 않은 장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먼저 비토리니의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는 명확한 스토리와 논리적인 구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이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까지는 아니었지만 기승전결이랄 것이 없는 구조였고, 상징성으로 도배된 매우 추상적인 작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어를 번역할 때 생기는 언어적인 생소함이 더욱 가독성을 방해했다. 분명 길지는 않은 소설이었지만 끝까지 읽는 데 애를 좀 먹었다. 아마 혼자 읽기 시작했다면 몇 장도 채 읽지 않고 포기했을 것 같다.

 

첫 독서 모임에 나가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꾸역꾸역 다 읽기는 했지만 책의 내용은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 모든 것은 기우였다. 일단 모두가 나와 비슷한 느낌으로 겨우 읽어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자 나도 몰랐던 내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모임원들이 내 말에 수긍하거나 관련된 질문을 해주면서 더욱 내 생각이 확장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을 적어 보자면, 이때가 하필 12.3 비상계엄 사태가 있었던 지 며칠 안 돼서 만난 모임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국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첫 부분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추상적인 분노’라는 개념에 모두가 공감했다. 비록 오래전 쓰여진 고전소설이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작가가 밝혔듯이 ‘시칠리아’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의 도시일 뿐이고 그 장소와 배경은 어디든 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참 시기적절한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특히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욕당한 세상’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오랫동안 토론했다. 나로서는 모욕당한 주체가 사람이 아닌 세상이라는 지점이 특이하게 다가왔는데, 어떻게 하면 세상이 모욕당할 수 있는 건지 모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의 대화가 가장 흥미로웠던 기억인데, 아쉽게도 두어 달이 지난 지금 끄집어내자니 희미하게 좋은 대화였다는 생각만 난다.

 

아무튼 첫 모임부터 ‘역시 독서모임의 맛이란 이런 것이지’하는 느낌으로 귀가했다. 나도 알아채지 못했던 내 감상을 늘어놓고, 적절히 도전적인 질문들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새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기분이었다. 혼자 읽었다면 어떻게든 끝냈다 해도 이만큼 깊이 있게 책을 이해해 내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달 걸러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은 <영원한 천국>. 항상 궁금해 하기만 했던 정유정 작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작품이었다. 스릴러로 유명한 작가라서 그런지 SF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스릴러적 면모가 두드러지는 책이었다. 사실 정유정 작가의 문체는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니어서 초반에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중반부에서부터 의외로 로맨스 부분이 시작되면서 푹 빠지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서도 잠시 나온 얘기지만, 스릴러로만 알려진 작가라고 하기에는 정유정 작가의 로맨스 묘사는 놀랍도록 정교하고 사실적이었다. 로맨스 장르에 별로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나로서는 이토록 로맨스에 몰입해서 읽는 게 생소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반적으로는 SF소설이라기엔 다소 엉성한 설정과 ‘무엇이든 가능한 영원한 천국은 정말로 인간에게 천국일까’하는 심오한 질문을 깊이 파고들지 못한 부분 등 아쉬운 점도 많은 책이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모임원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책이 건드리지 못한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천국이란 게 뭔지, 인간이란 어떤 동물인지, 권태와 불안 둘 중 하나만 가능한 건지 등. 혼자 책을 읽었다면 아쉬워하고 말았을 텐데, 책이 던진 질문을 더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독서모임은 매번 생각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물론 혼자 읽어도 모든 독서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지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읽기이다. 결국 독서의 목적이 소통이자 세계의 확장이라면, 독서모임이야말로 독서라는 행위의 화룡점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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