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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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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무언가 매체를 접할 때 각자 자신이 가진 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마련이다.  『블루 베이컨』이라는 도서를 읽고 나서 이런 말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책 분량의 절반 가량동안 필자는 여기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내가 아는 철학자 베이컨을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며 읽어간 것과 관련이 있다. 초반부만 해도, 나는 '아, 내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유명한 그림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했구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런데 중반부에 다다를수록, 내가 몰랐다고 하기에는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무래도 "아는 것이 힘이다."는 유명한 문장을 남긴 철학자 혹은 정치인이라는 기억이 너무 확실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지금 이 책에서 다뤄지는 프란시스 베이컨은 다른 사람이고 후자는 화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디어 들기 시작할 때쯤,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 야닉 에넬은 때마침 내가 읽고 있는 책 후반부에서 '이 책을 읽고 이 화가의 그림에 관심에 가져볼 수 있기를' 이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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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추측에 불과했던 이 엉뚱한 상상을 이토록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놀랍게도 근대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배다른 동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순간, 무언가 반짝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글이 야닉 에넬이 쓴  『블루 베이컨』 도서에 대한 적절한 글이 아닌 오히려 내 생각을 엉뚱하게 덧붙인 것으로 주객전도의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필자에게는 어떠한 상징적인 구도가 떠올랐고 이 구도를 한 번 설명하고자 노력할 것을 시도하고자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보여줬던 '인간의 무한한 자율성이라는 표상', 그리고 현대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표현하고자 했던 '존재 그 자체의 상처라는 표상' 간에, 엄청난 대비의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근대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근대 시기에 조명되기 시작한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능력을 신뢰했다. 즉, 필자는 지금 여기서 18세기 즈음 유럽에서 전개된 사상의 흐름의 전초를 닦아간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몽주의를 다루는 시각에서 필자는 마냥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 계몽주의를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계몽주의에 가미되어 있는 부정적 속성을 설명하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시각으로 계몽주의를 다뤄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아도르노의 시선에서, 인류는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발언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무한한 자율성'을 추구했음에도, 인류는 오히려 20세기에 접어들어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하는 '존재 그 자체의 상처'라는 표상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필자는 설명해보고자 한다.

 

『계몽의 변증법』 서문에서, 아도르노는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고 묻는다.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진보적 사유의 계기를 지니고 있었고, 그 계몽은 세계를 탈신화화함의 형태로 진보를 거듭하며 전개되어왔다. 그 과정을 거쳐 관찰과 실험에 기반을 둔 명제만이 진리임을 주장한 베이컨과 그 이후 다가올 학문이 추구하는 것은, 미신을 정복한 이성이 탈-신화화된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지식이다. 그렇기에 힘을 추구하는 지식은 개념이나 형상, 혹은 행복이 아닌, 효율적인 자연의 지배를 목표로 설정한다. 이 목표가 성취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는 지배를 위한 유용하고 실증적/사실적 지식들이며, 이러한 도구들에 의해서 밝혀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어떤 것들은 전부 발견되어야만 한다. 계몽이 사용하는 도구 즉,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들은 계몽주의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아예 존재나 사건으로도 인정되지 않는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계몽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출해낼 수 있는 잘 짜여진 체계를 이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리라는 것은 항상 통일성에 기반을 두는, 조직성을 갖춘 체계와 관련되어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아도르노에 따르면, 과학에 의해 마력의 환상이 깨진 계몽의 시대는 그 계몽이란 것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신화의 반복적 특성을 제거한 시대가 아닌, 오히려 그 특성이 법칙으로 자리 잡은 시대이다. 즉, 신화에 반대하여 계몽이 내세우고자 했던 계몽의 결과는 바로 신화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근대의 시기는 과학이라는 이상 하에 모든 것이 신화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할 제자리의 상태로 있게 될 것이라 설명했지만, 오히려 그 결과는 신화의 속성에 해당하는 반복적 속성을 자신의 법칙으로 자리잡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귀결된 것에는 과학의 이상의 기저에 깔린,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고 숨겨진 것은 없어야 한다'라는 불안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도르노는 인류 문명사의 발전의 귀결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강압을 분쇄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더욱 깊이 자연의 강압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것이 유럽 문명이 달려온 궤도다."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도르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프란시스 베이컨 역시 20세기 중반에 자신이 겪었던 1,2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끔찍함의 형상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아낸다.

 

 

"몇 년 후, 파리에서 "베이컨-피카소, 이미지의 삶" 전시회(2005)가 열렸을 때, 나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베이컨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마주하게 되었다. 1944년 전세계에서 자행된 대학살의 와중에서 그려진 이 3부작은 인류가 겪은 끔찍한 공포의 깊이를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증언한다."

 

(p.130)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눈에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을 그려내지 않는다. 야닉 에넬에 따르면, 미셸 레리스의 표현에 따라 베이컨은 그림이 눈에 미치는 영향과, 이 영향을 통한 정신의 장악이라는 문제를 지향한다고 본다. 즉, 베이컨은 눈을 통해 우리를 붙잡고 우리를 묶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야닉 에넬의 표현이 나에게 주는 효과가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에,과연 베이컨의 그림이 어떨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게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그림을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그림에 대해 야닉 에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재 자체는 상처를 통해 경험된다. 그것이 비극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을 "존재의 영원한 상처"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 그림은 인간의 삶을 옭아매는 이 결핍의 비극을 암호화한다. 결핍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결핍은 우리를 입방체 안에 가두고, 위대한 형이상학자인 베이컨은 그것의 숨막히는 투명 무늬를 드러내 보여준다. 결핍은 처음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죄책감은 결핍보다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온통 이중의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거기서 비롯되는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는다. 그리고 베이컨의 그림은 그것의 지워지지 않는 특징을 포착한다. 오이디푸스의 발은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으며, 붕대는 평생 피로 얼룩져 있다."

 

(p.102-103)


 

오이디푸스의 발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보편적 형상에 대한 상징을 나타낸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닦아놓았던 계몽주의는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실행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세계를 꿈꾸었지만, 시간이 지나 그의 후손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존재 그 자체는 상처이고, 우리는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신의 그림 속에서 표현해낸다.

 

그러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러한 보편적 주제 외에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림 속에 담아내기도 했다.

 

 

"1972년, 즉 (그의 연인) 다이어가 죽은 후 몇 달 동안 베이컨은 거의 자화상만 그렸다(그는 주변에 더 이상 그릴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후에 그가 얼굴에 가한 변형은 그림을 통한 자기파괴 시도의 일부이며, 그의 고통과 죄책감, 그가 느끼는 슬픔의 폭력성을 반영한다.

 

언젠가 그는 "나 자신에 대해 작업하면서 점점 더 날카롭게 껍질을 벗겨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지 다이어가 죽고 난 후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의 피부를 체계적으로 벗겨낸다. 그의 눈은 끊임없는 자기혐오의 첫 번째 희생양이다. 모든 자화상에서 그의 눈은 감겨 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공격당하고, 구멍 뚫리고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가 뜨인 눈을 그리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p.156-157)

 

 

그렇다면, 우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그저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도르노의 시선에서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낙관주의의 이상이 좌절된 절대적 무의 형상에 갇히기만 한 화가인 것인가? 저자는 책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고통 가득한 삶 속에서도 자그마한 희망은 있을망의 메세지 수 있다는 희를 베이컨이 여든 살에 그린 <세면대의 남자>를 가져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베이컨은 1989~1990년에 <세면대의 남자>를 그렸는데, 그때 그는 여든 살이었다. 그림은 서로 만날 때 그 근원의 단순함을 재발견한다. 알몸은 물과 연결되고, 물은 꽃과 연결된다. 엉덩이를 드러낸 건장한 베이컨은 그림을 통해 생기를 얻는다. 즉 베이컨은 여기서 자신의 이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밑바닥은 어두컴컴하지만, 우리 삶 어딘가에는 항상 샘이 반짝거린다. 그 샘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일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샘은 우리에게 미소 짓는 광채를 통해 스스로를 내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이 샘을 믿는다. 한번에 서너 시간씩 계속해서 글을 쓰다보면 문장 깊숙한 곳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이 바로 샘이다. 샘은 글쓰기의 비밀이다."

 

(p.166-167)

 

 

마지막으로, 나는 아래의 문장이 이 책의 저자 야닉 에넬이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과 그의 그림에 대해 경험하기를 원하는 심상을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베이컨의 삶은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극렬한 고통과 예민함 속에 살아갔지만, 그러한 순간들이 고도로 응축된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 그림이 전달하는 메세지를 통해 우리가 그 고통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마주함으로써 고통에 굴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베이컨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깃든 폭발성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추상화의 장식적인 위안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극단적 폭력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상처 입은 육체 뿐만 아니라 불타는 영혼까지 노출되는 이 장작더미에서 우리 대신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베이컨은 우리를 대변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만족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질료가 갇혀 있는 이 같은 고통을 인식하지만, 베이컨은 그것에 예술이라는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경험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정도 예민함의 차원에서는 사는 것이 참을 수 없지만, 그것의 극히 짧은 순간들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그림은 그 고통에 굴하지 않고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

 

(p.58)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야닉 에넬의 애정 어린 마음과, 마치 문학작품을 읽는 듯 프란시스 베이컨의 강렬한 예술 작품을 관람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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