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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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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동양적인 재료인 두부는 세심하고 어려운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무엇보다 연약하고 쉽게 바스라지는 것입니다. <장손>에서 이는 한국의 여러 세대에 걸친 가부장제를 상징합니다.”


<장손> GV에서 오정민 감독의 답변을 듣고 감탄이 나왔다. 이동진 평론가가 ‘올해의 한국영화’로 뽑은 <장손>은, 한 가족의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담고 있다. 이 가족의 삼계절을 엿보며 각 인물의 인생사에 웃고 울고 정들다보면 2시간 정도 만난 김씨네 가족이 마치 몇 년간 알고 있었던 이웃사촌, 또는 우리 가족 같이 느껴진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세대와 성별에 따라 공감하는 캐릭터가 각각 다를 것이다. 그 중 보이지 않는 희생과 노동에 대한 감독의 예리한 포착이 인상적이었다. 해외에서 거주할 때조차 제사를 지냈던 집안의 딸로서, 한국 사회의 20대 여성으로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인물들은 <장손> 속 여성들이다. 뿌연 김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여성 노동자들 중 특히 일하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건 사실 ‘김씨’ 가족에 속하지도 않은 태근의 아내, 즉 맞 며느리 수희이다. 임신한 손녀딸의 에어컨을 틀자는 말은 가뿐히 무시한 말녀는 장손 성진이 등장하자 시원하게 에어컨을 가동시킨다. 제사 장면에서 집안의 어르신 말녀를 포함한 모든 여성 인물들은 문지방 밖에서 머무른다. 땀 흘려 일했음에도, 누가 공장을 운영하는 공장주가 될 것인지에 대한 토론과 갈등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 인물들이 가정의 체제를 순응하고 유지시키는 방식이다. 집안에서 태근이 난동을 피우는 와중에 말녀는 한글을 소리내어 읽는다. 성진은 아버지를 말려야 하나, 하지만 말녀는 마치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듯 꿋꿋이 오디오를 겹쳐가며 소리를 낸다. 가족의 캐캐묵은 응어리를 풀어내기보단 그대로 묻어두는 순응과 답습의 역사를 말녀가 상징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대를 통해 깨달은 말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눈녹듯 붕괴한다. 김씨네 가족의 가부장적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보존했던 인물은 어쩌면 승필이 아닌 말녀가 아닐까.


김씨네 남성들 간에는 교묘한 연결 고리가 보인다. 그들은 서로 지독하게 싫어하며 동시에 서로를 연민하고 결국은 서로를 모방한다. 할아버지인 승필과 꾸준히 한 프레임에 그림자처럼 등장하는 성진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내면에 존재하는 말들을 맨 귀로 듣는다. 혜숙의 충격적 고백으로 휘청이는 뒷모습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아버지 태근이 학생 운동 이후 얻게 된 절뚝거림을 닮아있다. 가부장제의 주축인 승필은 성진, 아니 태근에게 “넌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공장 앞에서 망설이다가 어디론가 떠나버리며, 이때 관객은 아직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몸은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으나 정신은 과거 속 존재하게 된 그는 이제 자신처럼 사는 것을 거부하고자 방향을 튼다. 화면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느릿느릿 걷는 김승필씨를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장녀 혜숙의 선택을 통해 우리는 모든 시스템의 고장과 붕괴를 기대해볼 수 있으나, 영화는 이에 대한 확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차곡차곡 모으던 남편의 치료비가 증발해버렸다는 원통함에, 또다시 희생과 순응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는 데 이른다. 그래놓고 성진과의 대화에서는 태근을 적극적으로 연민하고 두둔한다. 끊어질 듯 얇아진 가부장제의 노끈에 불을 붙여 완전한 파멸을 촉구한 혜숙은 결국 자신의 선택을 두루뭉술하게 마무리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체제의 바통은 차에서 통장을 열어보는 ‘다음 세대’의 성진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따르는 무형의 전통과 체제에 견고함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궁금해진다. 다들 무엇을, 어떻게 붙들고 있는가?


영화 <장손>은 가부장제를 긁어낼 수 없는 한국 가족의 정체성 그 자체로 다룬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맞이할 미래를 나름 희망적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혜숙의 희생이 담긴 통장을 건네받은 젊은 성진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승필과 말녀가 그 돈으로 응원하고자 했던 선택은 무엇일까. 성진의 얼굴로 햇빛이 따스하게 비출 때, 우리는 미화의 아기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새로운 ‘봄’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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