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안전상의 이유로 통행이 금지된 공사장을 지나곤 한다. 보통은 빠른 속도로 지나지만 유독 갑갑해지는 장소가 있다. 사람 키보다 훌쩍 높은 가림막이 설치된 건축 예정지이다. 그 너머에 혹은 그 너머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벽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공간에 대한 기대보다 또 아파트를 짓는구나 하는 실소가 터져 나온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집의 의미를 떠나 하나의 투자 개념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한 명이 여러 채를 가지고 있다면 그 한 채도 편히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소유함에는 잘못이 없지만 누군가는 길에서, 말도 되지 않는 방에서 지내는 현실의 불평등이 왠지 야속하다는 마음이 든다. 집은 인간이 안전하기 위해 수천 년 전 동굴부터 현재의 초고층 아파트까지 계속 발전해 왔다. 하지만 분명 문과 벽과 지붕이 있지만 안전함을 보장하지 못하는 곳들을 우리 사회 곳곳에 너무나 많다. 안전하다는 감각은 많은 것을 충당해 준다. 그래도 최소한 안전한 공간 안에 있다는 생각은 무언가를 시작하게 해줄 여러 가능성의 도화지이다.
이런 불평등 말고도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무언가를 짓기 위해서는 전에 있던 것을 부숴야 한다는 것이다. 철거 현장을 본 적이 있는가? 순식간에 주택 정도는 사라지는 위용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분명 누군가의 터전이었을 장소는 너무 빨리 사라진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집이라면, 모두가 떠나고 남겨진 집이라면, 부서지기를 기다리는 집이라면 어떨지. 그리고 나면 생각한다. 부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지속가능성은 모든 분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ESG 경영같이 기업 윤리를 내세우기도 하고 소비자들 역시 이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 건축폐기물 등 다양한 문제가 제시되면서 건축 분야 또한 지속가능성 논의에 빠질 수 없게 됐다. 한 건물을 짓는 데에 장기적인 관점을 두는 시각에 더해, 이는 설계부터 해체까지 큰 책임이 필요한 점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는 반면, 아직 일상에서 지속가능성이란 실감나지 않는 단어이다. 오래된 아파트 앞을 지나가다 보면 안전 진단 D등급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종종 볼 수 있다. 거주지의 안전성을 보증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재건축에 한 발 더 가까워짐을 축하하는 모습이라니 착잡한 기분이 들곤 한다. 여타 해외의 사례들을 보면 100년 이상의 건물도 보존하며 사는데, 우리는 수명 이삼십 년에 이른 건물을 짓고 부수기를 반복한다. 물론 국내에서도 수리를 통해 그 가치를 이어 나가는 건물들도 적잖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례들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본다. 끝없이 공급되는 주거 단지들을 멈출 수 없겠지만 한 편에서는 오래된 건물을 부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이어나간다.
혹자는 서울 중심의 이 인구밀집도를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낡은 주거 환경을 재정비하는 일은 필요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을 무작정 많이 짓는다고 다수의 주거 환경이 개선될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고시원은 싼값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으로 웃돈을 받기도 하고 보증금이 요구되기도 하며 가격은 웬만한 월세에 버금간다. 평당 가격을 비교하면 오히려 전월세보다 높은 가격을 웃돈다는 조사도 나온지 오래이다. 질 낮은 주거 환경은 생활의 변화를, 결국은 또다시 빈곤의 굴레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살만한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다. 개인적으로는 첨단 기술이 적용되는 건물보다 오래된 건물을 잘 보존하고 시대에 맞게 잘 고쳐 사는 모습들이 삶에 맞닿은 지속 가능함으로 느껴진다. 기술의 수혜가 누군가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생태계 전반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길 기대한다. 공간이 주는 힘을 믿고 싶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장소가 많아졌으면 바라본다. 고층 빌딩의 층수를 높이는 것만큼 환경을 보호하고 약자를 품는 노력 또한 많은 이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한 평 방과 쌓아온 시간을 부수지 않고 살아가는 법, 계속 찾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