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서적을 읽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 <호라이즌>은 그 두께부터 압도적이었다. 각주와 참고 문헌을 비롯해 9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그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배리 로페즈라는 작가가 생전에 다녔던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직감하게 한다.
책을 읽어가며 저자의 세밀한 묘사에 놀랐다. 한 문장이 한 페이지의 절반 가까이 될 정도로 긴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한 줄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머릿속에 모든 장면이 세세하게 그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배리 로페즈가 제시한 풍성하고 입체적인 묘사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가보지 못했을 곳으로의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모든 분야를 초월한 성찰
평소 읽었던 책들과 다르게 이 책은 페이지를 빠릿빠릿하게 넘길 수 없는 책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듯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읽었던 것도 그렇지만, 저자가 중간중간 던지는 묵직한 질문과 침잠하는 사유들이 쉽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 컸다.
오늘날 우리가 어느 나라의 의회와 입법부에서 저만큼 겸허한 숙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느 의회가 윤리적 무책임성에 대한 질문을 성공적으로 논의 석상에 올릴 수 있을까? 서구의 어느 국가가 아이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정신적, 영적, 신체적 건강을 해결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이제 시대에 뒤처진 질문들로, 이제는 우리 상황과 무관한 질문들로 여겨지고 있는 걸까?P. 88 <들어가며> 中
요즈음 '미지의 세계'라는 표현을 잘 가려서 사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어떤 곳에는 '미지의 세계'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순간, 그곳을 구성하고 있던 문화, 역사, 구성원이 모두 지워지는 느낌이 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어쩌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개한) 곳'이라는 프레이밍을 통해 인류는 '미지의 세계'로 계속해서 전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러한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를 내려놓은 채 끊임없이 인류를 성찰하고, 비판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속적인 생태계 파괴로 인한 환경의 변화 등. 책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그 속에서 형성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을 읽어가다 보면, 어딘가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저자가 화석을 찾기 위해 투르카나 호수의 서부 고지에 캠프를 하러 갔을 때, 투르카나족 남자 세 명이 다가와 "왜 당신은 나의 집에 들어올 때 노크를 하지 않았는가?"라고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저자와 함께 캠프를 준비하던 '카모야'라는 인물이 그 투르카나족 남자와 대화한 내용을 보면 씁쓸함이 느껴진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뒤에 백인(저자)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공신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과 같은 사실들은 '과거 식민지였던 모든 곳에서 계속돼 온 어색하고 괴로운 만남들'의 대부분이 향하는 결론이다. 결국, 저자는 또다시 날카로운 성찰적 질문을 자기 자신, 그리고 독자들에게 던진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내가 정말로 캐물어야 할 유일한 윤리는 나 자신의 윤리다. 내가 허락을 구하지 않았던, 노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P. 471 <자칼 캠프> 中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현재를 살아가며 떨쳐내기 어려운 생각은, 인류가 원하는 끝없는 진보와 발전이 결국 자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부분에 있어 저자는 이미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답을 제시해 두었다.
인간 세계의 운명을 인간 이외 존재들의 세계와 분리하려 애쓰며 나아가던 우리는 바로 그 위협들 앞에서 별안간 멈춰 서게 되고, 비로소 생물학적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바로 자연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내리라는 현실을.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제 인간의 안락과 이득을 위해 자연 세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어떻게 협력해야 언젠가 자연 세계 안에서 우리가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적합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다.P. 85 <들어가며> 中
책의 곳곳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또 다른 인간의 파괴적인 행태를 지적해 왔던 저자는 그럼에도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가능성은 인류의 변화로부터 출발한다. 배리 로페즈가 보여준 장엄한 자연의 미래는 역설적이게도 결국 작디작은 인간의 행동과 선택에 달려 있다.
인류의 생존에 대한 위협들이 축적되면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엔 거의 선명하게 보였던 우리의 앞길에 이제 종말론적 장벽이 버티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 장벽 뒤에 무엇이 있는가다.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장벽 너머에서 무엇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가다. 무엇이 우리를 미래로 떠밀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P. 281 <스크랠링섬> 中
이 글의 첫 줄에서 나는 이 책을 '여행 서적'이라고 표현했었다. 사실, 이 책을 단순 여행 서적이라고 표현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철학적이면서도 묵직하고, 자연의 이면에 숨어 있는 상흔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배리 로페즈가 보여주는 자연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그 경이로움에 잠시라도 이끌려 책을 펼쳐본다면, 앞으로 우리가 자연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