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의무봉한 사랑의 공식 [영화]

폴 토마스 앤더슨, <팬텀 스레드>(2018)
글 입력 2024.12.2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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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공식이 있을까.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작업이 으레 그러하듯, 사랑도 대체로 정해진 과정을 거쳐 간다. 누군가를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고, 마침내 사랑에 빠지는 것. 예컨대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김현석, 2010)에서 ‘시라노 에이전시’가 상용(최다니엘)과 희중(이민정) 사이에서 사랑을 발생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작업들은 가볍고 우습지만 나름의 귀납적 논리로 무장한다. 다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사랑을 끝까지 단단하게 유지하는 일 앞에서 수없이 많은 연인이 좌절한다. 말하자면 사랑을 만드는 공식은 있되, 그것을 유지하는 방정식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 일관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는 사랑의 공식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랑의 공식을 제시한 영화가 있다. 허술한 공식을 따라가다가 좌절하고 마는 비관적 사랑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비록 아직 힘겨운 증명의 단계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사랑을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하는 영화다. 영화가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증명하는 공식의 결정적 전제는 이것이다. ‘사랑은 불완전함을 통해 완성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팬텀 스레드>(2018)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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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드레스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 루이스)는 까다롭고 완벽한 인물이다. 그는 거의 동일한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하고, 바쁜 하루를 마무리한다. 최고 수준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늘 시간에 쫓기므로 레이놀즈의 일상에는 그의 일과를 방해하지 않는 소수의 인물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입맛처럼 사소한 습관 하나조차 비틀 수 없을 만큼 그는 강박적이다. 레이놀즈의 동업자이자 누나인 시릴(레슬리 맨빌)조차 그의 일상을 관성적으로 유지하는 일에만 힘쓸 수 있을 뿐이다.


매사에 철저하고 냉정한 레이놀즈가 감성적인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은 오직 죽은 그의 엄마를 생각할 때뿐이다. 레이놀즈는 그가 최초로 드레스를 만들게 된 계기이자, 유일하게 위안을 느끼게 만드는 존재인 엄마를 그의 옷 속에 꿰매어 문신처럼 새기고 다닌다. 레이놀즈가 치열한 일상에서 엄마를 절절히 그리워하며 지쳐가던 어느 날, 시릴은 그에게 시골에 가서 잠시 휴식하기를 권한다. 시릴의 권유에 따라 시골로 향하는 레이놀즈의 여정은 운명적인데, 죽은 엄마와의 추억을 환기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그녀의 빈자리를 대체할(혹은 그럴 가능성을 품은) 여성을 만나기 때문이다.


레이놀즈는 아침식사를 위해 들른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알마(빅키 크리엡스)를 조우한다. 고요한 식당에서 알마는 유일하게 허둥대며 등장한다. 그녀가 레이놀즈와 정확히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소란스럽게 등장한 알마를 향해 레이놀즈는 오히려 웃음으로 화답한다. 많은 음식을 주문하는 레이놀즈와 그의 주문을 받는 알마 사이에 묘한 눈빛이 오간다. 언젠가 레이놀즈는 알마를 볼 때 허기를 느낀다고 고백하는데, 이 배고픔은 채워지지 않았던 애정의 대상을 발견한 후 끓어오르는 욕망의 은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후 레이놀즈는 까다로운 음식 취향을 핑계로 거의 먹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림을 느낀 채 만남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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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만난 첫날밤, 드레스 제작을 위해 레이놀즈가 알마의 몸을 일방적으로 관찰할 때 레이놀즈의 표정은 익숙하고 그녀의 표정은 불편한데,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레이놀즈와 다른 여성들의 그것처럼 일방적으로 설정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일방적인 관찰과 영감의 대상이 아니라 ‘드레스를 만드는 사람은 결혼을 못 한다는’ 그의 체념적 운명론마저 바꿔줄 사랑의 상대가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알마의 묘한 아름다움에 끌린 레이놀즈는 그녀를 연인으로 맞아 집으로 데려온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연인이자 그녀가 꿈꾸던 “완벽하고 당당한” 여성이 되어 그의 일상에 자리한다.


레이놀즈의 공간으로 들어온 알마는, 레이놀즈의 다른 연인들이 그러했듯이, 강박적인 그의 질서 안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마는 온전한 순종을 거부한다. 레이놀즈를 돕기 위해 온종일 서서 피팅을 해줄 수는 있어도, 그의 취향에 맞춰 자기 자신을 지워줄 수는 없다는 것. 아침식사에서 소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알마의 접시처럼 그녀의 존재는 레이놀즈에게 불편함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알마는 불편함을 느끼는 그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자신이 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을 밀고 나간다.


레이놀즈가 추구하는 사랑의 공식은 질서와 순응이다. 그의 질서는 그가 살아온 사교계의 세계 안에서 그의 위치를 확보하도록 만드는 장치다. 그가 만든 드레스는 그가 속한 세계 안에서 유통되어야 하므로, 그는 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때때로 드레스의 본질적 가치마저 배신한다. 그런 레이놀즈에게 사랑의 대상은 자신의 질서를 순응하고 보존할 누군가다. 반면 알마에게도 사랑의 공식이 있다면 그것은 충동과 필요이다. 그는 허기를 채운 레이놀즈의 갈증마저 자신이 채워줄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랑을 속삭이거나,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의 가치를 지켜주기 위해 충동적으로 사건을 벌인다. 알마의 충동에 의해 질서가 흐트러질 때마다 레이놀즈는 강렬한 애정을 드러낸다. 알마는 순간의 그 강렬함이 레이놀즈의 진실이라고 믿는다.


어느 날 심한 몸살을 앓던 레이놀즈는 주문 받은 결혼식 드레스를 망치고 만다. 레이놀즈는 완벽한 드레스를 만드는 장인이지만, 사고로 손상된 드레스를 고치는 일 앞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다. 지금껏 그의 삶은 고칠 필요 없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구멍 나고 얼룩진 사랑을 기우는 일은, 그러므로, 알바의 몫이 될 테다. 질서가 충동을 통해 깨지면 결여가 발생하고, 숨겨둔 약점이 드러난다. 결여와 약점, 그 불완전함을 채우는 것은 사랑의 몫이다. 바꿔 말하면 불완전함이 존재할 때에만 사랑은 오히려 영구히 완벽해진다는 것. 레이놀즈가 몸이 약해져 불완전해질 때마다 사랑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알마는 독버섯을 두 번 사용한다.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가서 약하게 만든 후, 그가 사랑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내어주기 위해서. 레이놀즈는 알마가 요리한 독버섯을 기꺼이 먹는다. 자신을 망가뜨려 약해진 후, 그 약함을 알마로 채워서, 사랑마저 영원한 천의무봉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영화의 첫 장면. 알마는 고백한다. “레이놀즈는 내 꿈을 이뤄줬어요. 대신 난 그가 열망하는 걸 줬죠.” 말하자면 꿈과 열망의 교환인데, 동일한 가치의 욕망을 교환하는 것이 사랑의 공식이라면 이것은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가 레이놀즈에게 무엇을 줬는지 묻는 의사 로버트 하디(브라이언 글리슨)의 질문에 대한 알마의 대답은 둘의 관계를 욕망을 넘어선 완벽한 사랑의 영역으로 끌고 온다. “내 전부요.” 영원한 사랑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전부를 갈아 넣어야 겨우 채워질 만큼의 결핍이 필요하다. 어쩌면 죽음과 맞닿아 있을 만큼. 이것은 완벽한 사랑의 공식을 위한 가설이다. 그러나 이토록 치명적인 가설의 증명 과정을 목격한 후에도 어쩐지 가슴이 답답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죽을 만큼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사랑해서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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