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빨리 감기의 미학

글 입력 2024.12.2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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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소설일 뿐이네 中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늘어지는 영상의 간격을 참지 못한다. 힘든 장면이 보이면 아예 커서를 움직여 건너뛰기도 한다.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을 삭제해 가면서 영상을 보기 시작하는 습관은 생각보다 빨리 자리 잡았다.


한 번은 황소와 어떤 드라마를 동시에 시작했는데 조금씩 내가 앞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내가 먼저 끝나 고요히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황소는 그런 내 시청 습관을 지금까지 이해 못 하고 있다. 뭘 제대로 봤냐는 것이 그 이유인데 나는 대체로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다.


내가 뛰어넘은 공백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 혹여나 틀렸더라고 하더라도 결과만 알고 있다면 그사이에 있는 일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작지 않은가...사실 쉽게 이탈하는 것은 시청자의 자유이지 않습니까...재미있는 부분만 보고 싶은데...


자유를 강조하다 주춤하게 된 것은 얼마 전이다. 한참 재밌게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보던 날 나는 결말에 와서야 이 영화를 이미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영화가 생각보다 잔인하고(판의 미로만 잔인하다며...) 고어해서 몇몇 부분을 스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전체가 통째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망각이 심할 일인가. 심지어 지난번에 에바 그린이 너무 아름답다며 적어둔 메모장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도...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은 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본 것들도,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들도. 가끔은 걷는 것도 너무 빨라서 멈추기가 쉽지 않다. 고작 2시간 남짓의 영화가 지겨워 몇 초씩 건너뛰어 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지난한 과정은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마음에 안 드는 챕터를 통째로 들어낼 수도 없는 이 삶에서.


"그런데 한 줄로 요약되는 이야기라면 그냥 처음부터 서로의 시간과 가성비를 위해 한 줄을 쓰고 끝내지 뭐 하러 한 권씩이나 쓰고 자빠지겠나."


구병모 작가의 '단지 소설일 뿐이네'에서는 가상의 인물로 대변되는 작가 S가 로그라인을 달라는 외부의 요청을 회상하면서 이같이 말한다.


그 문장 안에는 그저 한 번 소비되고 마는 것들에 대한 애도,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세상을 그저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해하려는 행위에 대한 분노. 이야기를 함부로 짓밟히는 대로, 함부로 쉽게 읽히도록 두지는 않겠다는 일종의 각오들이 뒤엉켜 있었다.


너무 빨리 지치고 포기하며 쉽게 다른 것으로 흥미를 이동하는 소비 방식은 비단 예술과 소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에는 영화, 다음은 책, 그다음은 사람, 그다음은 사회. 편하고 쉬운 것들은 참으로 전염이 빠르다.


책에서 S는 보란 듯이 어려운 단어를 섞어 만든 문장들을 구사한다. 기실, 필부, 저지레, 선해, 염결히...잘 쓰지 않는 단어들이 거칠거칠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읽는 내내 낯선 단어와 문장과 사이를 이어 붙이느라 시간을 세어가며 읽었다.


"사색 끝에 사색이 되어 경련하는 말들 속에서 최후까지 남아 있는 미량의 빛깔을 번역하고자 시도하며 그에 실패하기를 반복함을, 소설의 유일한 가치로 삼고 싶었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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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마침내 빨리 감기의 미학 같은 건 없다는 편에 완전히 서고 만다. 12월 초, 순식간에 대한민국이 1987년으로 회귀하는 비상계엄 사태가 발발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주말이 지나고도 세상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기다리는 일들이 있어 그 사이에 있는 시간들은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시간이 빠르게 갔으면 좋겠다. 오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사항을 달고도 시간은 원래의 속도대로 차근차근 흘러간다.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할 이야기도 있다. 지긋지긋하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어떤 모양의 끝은 오게 되어 있다. 악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눈을 바로 뜨고 걸어야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때도 있다.

 

지치지 않는 방법은 모르겠다. 울거나 소리치지 않는 방법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이 시기를, 이 상황을, 이 감정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야 생기는 힘도 있다는 것을 하루하루 깨닫는 중이다. 빠름과 미학은 어울리지 않는...그저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일 뿐이라는 것도.

 

우리는 어쩌면 저 건너편이라는 목적지에 닿는 것에 몰입하다가 디테일을 업신여기는 게 아닐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광속으로 스쳐 지나가기만 하네.(단지 소설일 뿐이네 中)

 

P.S. 크리스마스가 저무는 날 밤에는 황소와 함께 윤희에게를 봤다. 한 번도 건너뛰지 않고...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영화에만 몰두했다. 황소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내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느끼게 해준 영화인 것 같다"는 평을 내놓았다. 뭐 중요한 걸 한다고 내가 영화 보는 시간을 놓치고 살았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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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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