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마디 위로가 되어줄 명화들 - 도서 '치유의 미술관'

글 입력 2024.12.03 13: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전시회 다녀오면 마음은 이스트를 먹은 부풀은 빵이 된다. “와, 정말 멋있다”, “그들처럼 나도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살고 싶다”. 이들이 그린 작품의 의도라든지 영감의 원천을 나도 깊이 파헤쳐 봐야겠다는 다짐을 떠안고서 호기롭게 전시회장을 떠난다.

  

하지만 그 다짐은 하루도 안 가 줄곧 증발해버리고 만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우선순위가 높은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한가롭게 예술이나 보고 앉아있을 시간은 때로 지나친 사치라 느껴져서. 언젠가는 꼭 차를 한 모금 두 모금 홀짝홀짝 대며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미술 작품을 전부 분석하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감각해 보겠다는 오만한 상상. 그건 다음 생의 꿈이 된다.

 

삶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예술은 저 머나먼 행성의 이야기가 된다. 하물며 아트인사이트에서 활동을 하며 월에 1-2회 문화 초대를 향유하는 것마저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들 때가 있는데, 그 막중한 압박감은 이런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내 생존과 번영에 더 우선순위에 있는데, 당장 향유한다고 삶을 바꿔주지도 않는 이 작품들을 꼭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봐야 하나? 피곤함을 무릅쓰고, 눈을 뒤집어까면서까지 책을 읽으며, 혹은 졸음을 물리치며 연극을 봐야 하나.

 

언젠가는 문화 예술이 얄미운 적도 있었다. 문화 예술의 경지는 너무나 높은 것이고, 인고의 시간을 들인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바라보는 나는 문화 예술을 생산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영원한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저 남들이 멋지게 일구어 놓은, 생을 바친 작품들을 박수만 쳐주면서, 언젠가 나도 이런 멋진 결과물을 낼 거라 매번 생각해도 결국 어지러운 현실의 블랙홀에 빨려 시작조차 못하는 걸 반복하면서 겪어야 하니까. 사실 진실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고, 할 수 있다는 확언보다는 ‘핑계’를 한가득 쌓아놓는 하소연인 걸 알면서 계속 같은 사고 회로를 돌리며 얄미워했다. 참으로 황당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또 어떤 때는 사후에야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는 걸 볼 때면 또 그게 얄미웠다. 그 사람의 생애는 실패로 점철된 과정을 겪었더라도, 사후에 유명해졌으니 그 모든 실패와 과정은 응당 빛나는 것이었다고 합리화해버리는.. 그건 그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일 텐데. 과연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이 세상이 아득하고 멀다고 생각했을까. 눈을 감으면서까지 자신의 모든 노력이 인정받지 못했다면 정말 마음 편히 떠났을까. 그러니 왜 그토록 문화 예술이라는 산은 이리 험하고 높아 보일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거슬러서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어떻게든 발자취를 남길까.

 

처음에는 문화 예술의 넓이와 다양성에 신이 나서 빠져들었고, 이 분야 저 분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뷔페식 접근을 했다. 연극, 전시, 도서, 공연 등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관심 주제가 조금이라도 연결되면 문화 초대를 신청해서 현장 향유를 했다. 벌써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 초대 향유를 하며, 하나 느낀 것이 있다. 문화 예술은 누군가의 전적인 소유가 아니라는 것. 문화 예술은 우리의 삶 자체의 메타포라는 것. 그렇기에 얄미운 감정이 들었던 것은 사실 나에 대한 자기 확신의 부재 신호였다. 문화 예술을 삶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설익었다는 신호일 뿐이었던 것이다.

 


치유의 미술관_표1.jpg

 

 

그런 의미에서 도서 <치유의 미술관>은 다시금 문화 예술의 의미가 삶에 대한 메타포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더 나아가, 생산자와 관찰자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진정 삶으로 문화 예술의 온기가 스며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도 다양한 미술 큐레이션 책들을 접해보았지만, 저자의 배경과 가치관, 철학에 따라 같은 작가, 같은 작품이라도 해석하는 관점과 방식이 모두 달랐다. 나의 열린 시야와 태도라는 새로운 변수를 가지고 이번 책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또 하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이었다. 마음이 지치고 멍들어서 정말 ‘치유’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다른 때라면 이 치유라는 단어가 세상에 진부하게 돌아다니는 말 하나쯤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치유의 힘이란 무엇일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저 두 손 두 팔 벌려, “치유하러 오세요”라고 말을 거는 책의 초록빛 표지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것이다. 그저 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으면 기꺼이 다시 문화 예술의 품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이번에는 얄미워하지 않고 진짜 편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며.

 

그렇게 받아든 <치유의 미술관>은 하루에 한 챕터씩, 잠이 들기 전 저녁 또는 기상 직후 아침에 읽었다. 기상 직후라면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밤사이 잡생각이 말끔히 비워진 상태기에 비워진 상태로 삶에 필요한 처방전 또는 수액 같은 몇 마디를 수혈하는 기분. 하루를 청정 공기로 물들여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모든 피로가 찌들어 금방이라도 애벌레처럼 나뒹굴고 싶은 저녁에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한 챕터라도 읽으며 밑줄을 쳤다. 그러면 꼭 내 정신 상태와 마음에 꼭 필요한 문장과 문단들이 줄지어 보이는 것이다. ‘아, 읽기 잘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명랑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또 그다음 하루를 시작했다.

 

교과서에 밑줄 긋고 시험에 나오니 외우라고 했던, ‘아 그 사람 알지’라 생각했던 작가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접했다. 그러고선 놀라워했다. 2024년 12월 내가 하는 고민의 궤적이 그들의 발자취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였다. 에드바르 뭉크, 파블로 피카소, 피에트 몬드리안, 폴 세잔, 구스타프 클림트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이 사람들. 이들은 이름만 알려졌지 ‘삶’ 자체는 정확히 이해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내가 단단히 이들의 삶을 오해했던 것이다. 엄청나게 유명한 그림들을 자랑스럽게 떡 하니 올려놓고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산, 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삶은, 우리가 겪는 고민, 불안, 아픔, 슬픔, 괴로움에 비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상상 불가능한 규모의 역동적인 궤적을 쌓아 올린 그 무엇이었다.

 

<치유의 미술관>은 크게 4부의 파트로 각 주제마다 다양한 작가들의 삶, 이야기, 지금껏 몰랐던 작품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한가득 담고 있다. 1부는 ‘아무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날에’, 2부는 ‘내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하는 날에’, 3부는 ‘버티고 견디는 삶에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날에’, 4부는 ‘막연한 내일이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밤에’. 어쩜 1부부터 4부까지 단 한 주제도 빠짐없이 지금의 우리네 삶을 서술한 느낌이 들지 않나.

 

이 책을 쓴 윤현희 작가는 그림에서 마음을 읽는 임상심리학자다. 시각예술과 화가들의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심리학적 분석으로 큰 공감을 얻어 <자화상의 심리학>, <미술의 마음>, <미술관에 간 심리학> 등의 저서로도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힘을 주었다. 이번 <치유의 미술관>에서는 우리의 모든 날을 위로하는 선물을 보내는 마음으로 책을 완성했다고.

 

 

IMG_4790.jpg

 

 

이번 리뷰에서는 <치유의 미술관> 속에서 내게 울림을 준 작가 두 명을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천사’가 자신을 따라다녔다던 에드바르 뭉크.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아는 1893년 작품 <절규>가 대표작이다.

 

그가 그린 <절규>는 어쩌면 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뭉크가 이 정도로 힘겨운 인생을 버티고 버텨낸 사람일 줄은 몰랐다. 이제야, 어째서 왜 그가 죽음의 그림자와 공포로 가득 찬 세계관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해는 너무할 정도의 무자비한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 20대에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폐렴으로 사망하고, 여동생마저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 입퇴원하길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뭉크는 매분 매초 불안과 공포의 눈덩이가 걷잡을 수 없이 ‘타의적으로’ 커지는 걸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알코올 의존중, 조울증, 조현병 등 여러 정신건강의학적 문제로 고통 받았다.

 

뭉크의 그림이 시대를 거슬러 아직까지 주목받는 이유는, 그는 그의 절망을 미화로 포장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처절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맞서거나, 익숙함에 복종하는 선택에서 그는 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을 일구어가는 과정이고, 그 행로는 우울과 환희, 쾌락과 고통, 충만함과 공허함, 기쁨과 슬픔 등 양극을 왕복하는 진자의 움직임과 같다. 삶에 대한 심리적 통찰이 필요한 이유는 그 진폭의 리듬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다.

 

실존적 불안과 우울, 공황은 피하기 어려운 삶의 기본값이자 인간의 조건이다. 대개 불안이란 대상에 대한 모호한 인식과 낯섦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 실체를 마주하고 정체를 확인해 나갈 때 막연히 불쾌했던 감정들이 구체화되며 익숙한 감정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지는 이것들과 정면으로 대결해 싸우거나 익숙해져서 복속하거나 둘 중 하나다.”


 

- p.68

 

 

한 해가 거듭될수록 분명한 진리로 확신하고 있는 것 중 한 가지. 바로 책 속의 한 구절처럼 실존적 불안과 우울, 공황은 피하기 어려운 삶의 기본값이자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자명한 ‘현상’ 또는 ‘진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오히려 가장 빠르게 이 구렁텅이에서 생존할 수 있는 행동이 된다.

 

나 또한 몇 달간 마음이 허물어지고 너덜너덜해지는 경험을 지속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상처를 회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 상처를 덮어두지 않는 것이다. 온전히 바라보며 직면하는 것이다. 살이 찢기는 듯 고통스러워도, 바라봐야 한다. 그러니 뭉크의 절규처럼 때로 미쳐버릴 듯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그 자체로 그것이 ‘나’의 현재 상태임을 부인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알아차리는 과정의 시작이다.

 

한때 나의 마음이 슬픔과 고통으로 물들을지 언정, 지금 이 상태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모두 지나갈 것이고, 끝내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단아하게 미소 짓는 산뜻함이 아닌 눈물과 일그러짐으로 범벅된 어느 날일지언정 그 또한 삶의 모든 순간이니,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듭하고 있다.

 

 

IMG_4793.jpg

 

 

내 삶과 공명했던 또 한 명의 작가가 있다면 피에트 몬드리안. 그는 자아를 내려놓고 질서의 일부가 되는 치유의 방법을 알려줬다.

 

몬드리안은 성미가 불같은 아버지의 강요로 20세가 되던 해에 미술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나, 화가의 길을 택했다. 허약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누나가 가정을 돌보았으며, 장남인 그도 누나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는 동시에 너무나 참혹했던 대량 학살과 죽음들을 바라봤다. 그에게는 미칠 것 같은 삶의 혼란과 불안정성이 가득한 채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질서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질서 속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와 규칙을 만들어낸다.

 

그는 조형의 본질적인 요소에 온 정성을 쏟아부었다. 몬드리안은 두 선이 직각으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공간들을 그리며, 수평과 수직의 안정을 그의 손에서 직접 창조해냈다.

 

 

“때로 상처 입은 마음은 감정이 배제된 자연 속 수학적, 과학적 논리의 정확한 질서를, 자신을 위로하고 잡아줄 견고한 닻으로 삼는다. 자아를 내려놓고 그 질서의 일부가 됨으로써 감정이 비집고들 틈이 없게 만든다는 점이 누군가에게는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조용한 치유 방법이 되어주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마음이 만든 그의 미학은 유럽인들의 피폐해진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 p.153

 

피상적인 외양을 묘사하는 데서 벗어나 조형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몬드리안에게 남은 요소들이랑 수평선과 수직선밖에 없었다. 그는 양적, 동적이며 상승의 기운을 갖는 것은 모두 수직선으로, 음적, 정적이며 안정의 기운을 담은 것은 모두 수평선으로 나타냈는데, 두 선이 직각으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공간이야말로 그에겐 가장 균형적인 힘과 질서가 안정된 공간이었다.” - p.156

 


삶의 불안정성과 혼란을 벗어나고자 비물질적인 단순함을 추구한 몬드리안. 그는 상처받고 스산해진 마음을 위로하고자 자연의 원리를 꾸준히 그려갔다. 그가 가진 원칙주의적 아우라는 수평선과 수직선처럼 변하지 않는 균형적인 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이란 시대라는 바다에 가라앉지 않게 해주는 ‘부력'이었다” - p.153

 

그 담담해 보이는 격자가 만든 담백한 그림에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깊어진 시선, 뜻대로 되지 않아 고통스러웠을 시행착오의 흔적, 매일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흘린 눈물까지 너무 촘촘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무수한 균열을 품고 있다. 모든 것이 지금의 몬드리안을 있게 한 시간의 주름이다.” - p.164

 

 

몬드리안에게 그림이란 사회의 혼란, 변화에 가라앉지 않게 해주는 '부력'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누구에게나 비바람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도 꼭 부여잡을 구조대가 하나씩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글쓰기가 된 것이고, 몬드리안에게는 그림이었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나만의 심리적 '부력'은 모든 삶에서 필수적이다. 지금 당장 눈 앞에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혹은 영영 알 수 없더라도 괜찮다. 삶의 한 걸음을 더 나아가게 하는 그 무엇이라면 우리는 오늘을,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일상의 한 페이지에 <치유의 미술관>을 들이자,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의 세포들이 겹겹이 쌓이는 걸 실감했다. 머나먼 외딴섬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침반을 만났다.

 

가끔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이 홀로 우뚝 서 있어야 할 때. <치유의 미술관>을 마음에 들이면 분명 삶에 지친 마음을 조금은 툭 내려둘 수 있을 것이다.

 

 

[신지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5.01.1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