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흔들리는 시대적 삶과 예술, 신념 사이 마주한 '타인의 삶' – 연극 타인의 삶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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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에는 연극의 스포일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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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7일 (수), LG아트센터 서울(마곡)의 U+ 스테이지에서 연극 <타인의 삶>이 개막했다. 연극 <타인의 삶>은 2007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던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손상규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이번 연극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주관하는 연간 기획 공연 프로그램 CoMPAS 24(Contemporary Music and Performing Arts Season)의 올해 마지막 작품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연극은 2025년 1월 19일 (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타인의 삶>(2024), 각색/연출: 손상규, 출연: 윤나무, 김준한, 최희서 외
나는 지난 11월 29일 (금) 15:00 공연을 관람했다. 해당 일시의 캐스트는 윤나무 (게르트 비즐러 역), 김준한 (게오르그 드라이만 역), 최희서 (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 김정호 (브루노 햄프 외), 이호철 (그루비츠 외), 박성민 (우도 외) 배우들이었다. <타인의 삶>은 초연 전부터 뛰어난 배우들의 조합으로 큰 기대를 모은 바 있다. 특히 이번에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한 배우 이동휘와 김준한은 각각 게르트 비즐러와 게오르그 드라이만 역을 맡았다.
연극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을 배경으로 한다. 극은 격변하는 시대, 체제의 예술 검열과 규제 속에서 모종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제와 배경이 이러한 만큼, 극은 정치, 사회와 같은 거시적 장치에 완전히 맞닿아 있으며 떼려야 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삶>은 한 인간, 개인의 삶과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눈에 띄는 강렬함으로 인상적인 포스터를 다시금 들여다 보자. 비즐러의 도청장치와 드라이만의 타자기가 완전히 이분화 된 하얀색 면과 -핏빛 잉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 면 속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활자들은 비즐러가 도청하고 있는 소리들처럼 보이기도, 극작가였던 드라이만이 비밀리에 신문에 실었던 동독 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목부터 포스터까지 매우 다층적으로, 중의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등장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극을 이끌어가는 비즐러, 드라이만, 크리스타 중 완전무결하고 일관적인 인물은 없다. 원래 인간이 단순하고 평면적이지 않듯이 말이다.
배우 윤나무, 김준한, 최희서는 선택의 기로 속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입체적인 인간상을 뛰어나게 표현해 관객들을 완전히 극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당에 충성하던 동독 최고의 비밀경찰, 게르트 비즐러(윤나무)는 체제의 필수적 부품으로서 강박적 사회주의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 그렇게 비즐러는 우연한 계기로 예술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된다. 그가 해왔던 여느 업무와 다를 바 없는 도청 작업이었을 테다. 하지만 비즐러는 체제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과 필연적으로 이에 저항할 수 밖에 없는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던 드라이만과 그런 그와의 관계에서 위기를 겪는 크리스타에게 어쩐지 동화되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시대적 신념으로 뭉친 그의 삶에는 균열이 일었고, 한 번 시작된 변화는 겉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다. 극의 끝으로 달려갈수록 비즐러는 극의 초반, 타인의 삶에 동화되지 않았던 자신과 완전히 다른, 당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주체성과 의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윤나무 배우는 영화에서도 크게 찬사 받았던 엔딩 장면을 오롯이 이끌어가며 마지막까지도 최고조에 달하는 감동을 선사했다.
게오르그 드라이만(김준한) 역시 ‘타인의 삶’을 목도하고 변화하는 인물이다. 당대의 동독은 물론 수많은 독재, 사회주의 국가들이 예술을 정치적 선동, 즉 ‘정치의 심미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불온한 마음’을 부추기는 예술은 규제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체제를 선전하는 예술가는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명성과 부를 얻었다. 당에 완전히 충성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검열과 규제를 완전히 거스를 수 없기에 체제 속에 순응하며 최선의 예술을 하고자 했던 극작가 드라이만은 각별한 친구이자 연출가였던 예르스카의 예술과 삶이 어떻게 체제의 억압에 의해 무너지는지를 접하게 된다.
‘이대로 살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자신 역시 예르스카처럼 명성이 무너지고 예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칠까 두려운 마음과 그럼에도 소리 내어 그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의지 사이에서 드라이만은 갈등 끝에 후자를 택한다. 권력과 체제에 순응하는 시대적 삶과 규제에 억압된 시대적 예술은 그렇게 송두리째 흔들린다. 동독의 자살 문제를 꼬집어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글을 신문에 실으려는 드라이만의 결심이 드러나는 방백 장면에서 김준한 배우는 에너지 서린 목소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아 전율이 일게 만들었다.
연극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을 마주하고 시대적 삶과 예술, 신념이 흔들리자, 이로 인해 처연하게 고뇌하고 처절하게 갈등하는 시대적 인간들의 이야기다. 이 기로 속에서 의지에 따른 선택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좌우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완전한 해피엔드, 완전한 새드엔드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 우리의 인간사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어떠한 선한 선택 이후에도, 결국 권력은 변하지 않고, 실패한 것 같은 삶만이 남겨 지기도 한다. <타인의 삶>은 이러한 현실을 솔직하게 내보이면서도 결국 갈등과 고뇌 속 ‘옳다’고 믿는 의지에 따른 선택을 했을 때, 결국 삶은, 타인은 그에게 끝끝내 찬사를 보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들은 타인의 삶에서 나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예술, 신념은 안녕한가?
[신지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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